관점에서 주체와 대상의 문제

일반적으로는 주체와 대상을 구분하지 않으므로 혼선이 빚어진다. 예컨대 개인주의라고 하면, 개인이 의사결정의 주체라는 건지, 아니면 개인이 의사결정의 대상이라는건지에 따라 의미가 상반된다.

보통 개인주의는 자기 개인의 일만 신경쓰고, 가족이야 어떻게 되든 나몰라라 한다는 말로 치부된다. 의사결정의 대상을 개인으로 놓는다. 그런데 이건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같게 보는 것이다.

박정희 독재정권 때다. 가족을 돌보지 않고 선배도 무시하고, 후배도 챙기지 않고, 이웃의 시선도 무시하고 오로지 개인의 쾌락만 탐하는 서구의 개인주의는 나쁘다고 우리는 교과서에서 배웠다.

중국도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주장하며 그렇게 선전하고 있다. 서구 개인주의 문화의 폐해 운운한다. 그러나 언론에 보도되는 것으로 보면 실정은 완전히 반대다. 중국의 나몰라라는 유명하다.

며칠 전에도 식당에서 여성이 전도활동을 하는 사이비집단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집단폭행을 당해 살해되었는데 식당의 손님 수십 명은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다고 한다.

개인주의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오히려 이웃을 잘 돕고 공중도덕을 지킨다. 중국의 집단주의에 포함되는 집단은 가족과 꽌시 뿐이기 때문이다. 비난받아야 할 개인주의는 중국이 더 심하다.

서구의 개인주의는 파시즘을 반대하는데 밑줄이 그어져 있다. 개인이 의사결정의 주체가 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인주의다. 오직 개인만을 의사결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이기주의다.

세월호의 교사들과 많은 피해자들은 의사결정을 선장에게 위임하고 독립적인 판단을 하지 않았다. 파시즘적 사고에 매몰된 것이다. 한국은 개인주의 교육의 부족이 도리어 문제였던 것이다.

집단 안에서 개인이 의사결정의 주체가 되는 개인주의와, 오직 개인만 의사결정의 대상으로 삼고 다른건 나몰라라 하는 이기주의는 다르다. 그런데 이렇게 복잡하게 설명하는 것도 이상하다.

이는 언어의 문제이다. 언어라는 의사소통 수단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이 때문에 많은 불필요한 논란이 일어난다. 중국의 도교만 해도 그렇다. 내 몸에 있는 터럭 하나를 뽑아서 천하에 이익이 된다해도 끝내 그 털을 뽑지 않겠다는 양주의 이기주의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보면 양주야 말로 천하와 일대일로 맞서는 기개를 보여준 사람이다. 사실은 양주의 진의가 잘못 표현된 것이다. 왜냐하면 양주의 위아설과 노자의 무아설은 상호보완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역동적인 천하 안에서 나의 포지션을 찾는 노자나, 천하와 맞섬으로써 나의 역동성을 찾는 양주나 천하와 일대일에서 의사결정이라는 본질은 같으며 그 결과는 주체의 부각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불로장생설로 나간 것은 잘못 전개된 것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개념도 그렇다. 안대희가 그동안 수신을 잘 하다가 박근혜 캠프에서 축출되고 뿔다구가 나서 ‘에라이 돈이나 벌자’면서 수신을 망친 거다. 그동안 수신이 잘 되었는데 왜 평천하를 못했을까?

거꾸로다. 평천하의 야심을 가져야 수신이 된다. 안대희는 무려 50년간이나 수신을 잘 하다가 막판에 망쳐버렸다. 그것은 박근혜 캠프에서 쫓겨나면서 평천하의 야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수신을 왜 하는가?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서다. 좋은 평판 얻어서 뭐하게? 출세하겠다는 거다. 좋은 평판을 얻어야 출세하는 것도 맞고, 출세할 야심을 가져야 좋은 평판을 얻는 것도 맞다.

주체의 관점이냐 대상의 관점이냐에 따라 언어표현이 완전히 달라지는데 한국어로 이 부분을 옳게 나타내기는 무리다. 그런데 일일이 이렇게 길게 토를 달아서 설명할 수도 없지 않은가?

깨달음으로 해결할 밖에. 깨달음은 자신을 능동적인 의사결정의 주체로 놓는 것이다.

구조론의 1인칭은 영어의 인칭과는 다른 의미다. 어떻든 주체와 대상을 분리하는 즉 실패다.

◎ 3인칭 – 주체를 고정시켜놓고 주체로부터 분리된 대상을 본다.

◎ 2인칭 – 개인주의 논쟁처럼 주체와 대상을 구분하지 않아 헷갈리게 한다.

◎ 1인칭 – 주체에 능동의 역할을 부여하고 대상을 주체에 포함시킨다.

나는 결코 대상화될 수 없는 의사결정 주체이다. 나를 객관화 하는 3인칭 방법은 주체를 찾아가는 과정에서의 통과의례에 불과하다. 위빠사나니 사마타니 하는 소승적 수련법들은 대개 나를 객관화 하는 것이며 가짜다.

나를 위한다는 말 자체가 나를 대상화 하는 말이다. 나를 위할 수 없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1인칭 슈팅게임은 자신에게 능동적인 역할을 부여한다. 내가 적과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 전체가 나를 구성한다. 게임은 나를 발달시켜 가는 과정이다. 세상을 게임 안의 아바타로 보는 관점을 얻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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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kim

2014-06-03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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