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철학은 사기다**

프랑스철학이 ‘지적 사기’라는 말은 전부터 있어왔다. 수학을 배운 사람은 계산을 잘 한다. 철학을 배운 사람은 의사결정을 잘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프랑스철학이 의사결정에 도움이 될까?

의사결정능력은 예술과 산업에 바로 반영된다. 프랑스철학이 의사결정에 도움이 된다면 왜 프랑스 영화는 세계 극장가를 휩쓸지 못하는 걸까? 프랑스철학이 가치가 있다면 왜 프랑스 음악과 프랑스 미술이 세계 음악계와 세계 미술계를 뒤흔들어놓지 못할까? 문제가 있다.

우리가 일본을 만만히 보는 이유는, 일본영화가 한국영화만큼 흥행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일본음악도 마찬가지. 패션이나 디자인도 일본이 한국에 많이 앞서있지는 않다. GDP의 큰 격차와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확실히 일본인의 의사결정 능력이 한국을 앞서가지는 못한다.

지하철에서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해내는 것은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다. 그 상황에서 손도 깜짝 안 하는 중국인은 논외로 하자.

왜 사람들은 프랑스 가구가 아닌 북유럽 가구를 선호할까? 물론 일본문학은 확실히 한국문학보다 낫다. 프랑스문학이나 패션도 일정한 위치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영국음식의 형편없음을 보고, 영국을 얕잡아보듯이 프랑스 산업의 낙후를 보고 그들을 얕잡아보게 된 것은 사실이다.

  1.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의 주인인가?

  2.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것인가?

올해 출제된 바깔로레아 문제 중 일부다. 프랑스니까 막연히 뭔가 있어보인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건 수준이하다. 문법적으로 비문에 가까운 것은 번역자의 잘못이라 해도, ‘예술이란 무엇인가’, 혹은 ‘행복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알아듣게 가는게 차라리 맞다.

왜 이게 철학이 안 되느냐 하면 주인이라는 개념이 예술이라는 개념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질문 자체에 가치전도가 나타나 있다. 잘못된 방향으로 사고를 규격화 한다.

전체를 제시하고 부분을 묻는게 모든 질문의 공식이다. 작은 그릇에다 큰 그릇을 담아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물리법칙이므로 절대 어기면 안 된다. 예컨대 ‘과일 중에서 사과를 고르시오’는 말이 되지만, ‘사과 중에서 과일을 고르시오’는 말이 안 된다.

전체를 나타내는 명사가 앞에 오고, 부분을 기술하는 동사가 뒤에 와야 한다. 그런데 거꾸로 되어 있다. 주인으로 표현된 권력 메커니즘이 문제의 전제가 되고, 예술을 예로 들어 그 메커니즘을 설명해야 한다.

2번 문제 역시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집어넣었다. 행복은 개인에 해당하는 특정 시공간적 지점에서의 심리적 반응이고, ‘사는 것’은 개인을 넘어선 집단적 대응이다. ‘총을 쏘기 위해서 전쟁은 터지는 것인가?’ 이런 식의 엉터리 질문은 곤란하다. ‘공동체적 삶의 어느 지점에서 개인의 행복은 도출되는가?’ 이런 식으로 전체를 앞에 놓고 부분이 뒤에 따라붙어야 문제가 성립된다.

  1. 변화하는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장 안에서, 어떻게 자신이 그 세계의 진정한 주인으로 올라설 수 있으며, 이에 따른 예술작품의 대중적 소통가능성의 획득은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는가?

  2. 공동체적 삶의 어느 지점에서 개인의 행복은 도출되는가?

이런 식으로 질문해야 맞는 질문이 된다. 1번 질문은 예컨대 싸이가 유튜브에 진출한 바 변화하는 첨단환경과의 적극적인 상호작용이 예술의 대중화로 전개된 점을 미디어 이론을 중심으로 풀어내면 된다. 미디어의 발달사는 상호작용의 밀도증가와 대중예술의 확산과의 함수관계로 설명될 수 있다. 2번 질문은 집단의 성취와 개인의 행복의 관계로 예컨대 한국의 월드컵 4강진출이 과연 개인을 행복하게 했는지를 논증하면 된다. 반드시 문제 안에 답이 있어야 한다.

바깔로레아가 독서인구를 늘리고 문장력을 발달시키는 효과는 있겠지만 본질에서 철학과는 관계없다. 의사결정능력을 향상시키지 못한다. 고승덕이 ‘딸아 미안하다’ 하고 외치는 장면은 웅변학원에서 가르치는 수법인데, 그게 그다지 득표에 도움이 안 된다. 왜? 가짜이기 때문이다. 물론 바깔로레아도 약간의 가치는 있다. 고승덕의 샤우팅도 약간의 도움은 되었을 수 있다.

고승덕 샤우팅은 절대 즉흥적으로 나올 수 없는 고급기술이다. 이건 학원에서 배운 거다. 근데 가짜다.

프랑스철학은 죽은 철학이다. 프랑스가 바깔로레아로 인류의 진보에 기여했다는 증거는 없다. 잘못된 프랑스 철학이 프랑스를 죽이고 있다. 바깔로레아가 제대로 기능한다면, 지금 한국인들은 프랑스 차를 타고, 프랑스 옷을 입고, 프랑스 가구를 쓸 것이다. 프랑스 음악을 듣고, 프랑스 영화를 볼 것이다. 철학과 예술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며, 철학이 죽으면 예술이 죽는다. 예술과 산업 역시 뗄레야 뗄 수 없다. 인류의 실질적 삶과 겉도는 철학은 거짓이다.

철학을 빙자한 허무 퍼포먼스일 뿐이다. 조선시대 과거제도처럼 잘못된건 잘못된 것이다. 물론 제한적으로는 과거제도가 기능한다. 그러나 영조이후 실질적인 의미에서 과거제도의 인재발굴기능은 정지되었다. 그것은 완전한 사기다.

유명 화랑 운영자에게서 들은 말인데, 독일화가들은 그림은 아주 조금 그려놓고 말로 때우려드는 나쁜 버릇이 있다더라. 개념미술이 지나치게 관념화 된 것이다. 노가다 한 정성이 안 보인다. 조형이든 이미지든 일단 묵직한 덩어리로 제압해야 한다. 그래서? 말로 때운 결과 독일그림이 망했다.

학승과 선승에 대해서 논하고 있지만 학승은 가짜다. 그건 안쳐주는 거다. 신학은 가짜다. 성경은 가짜다. 불경은 가짜다. 말로 때우는건 그림이 아니고 사기다. 속임수다. 그림에 왜 설명이 필요한가? 5초 안에 관객의 물리적 반응을 끌어내지 못하면 실패다. 왜 프랑스 그림, 독일 그림이 미국에 밀릴까? 그게 본질에서 사기이기 때문에 당연히 밀리는 거다.

프랑스는 바깔로레아라는 거국적 사기 때문에 망한다. 학승은 가짜다. 물리적 반응이 아니면 가짜다. 미국은 조잡해도 진짜고, 프랑스는 정교해도 가짜다. 가짜는 진짜를 이길 수 없다. 프랑스가 거짓 철학의 환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동안 독일과 스칸디나비아가 유럽을 점령하고 세계를 휩쓸고 있다.

음식에 비유할 수 있다. 불교를 믿어 살생을 금지한 일본인은 전통적으로 고기를 못 먹는다. 그렇다면 음식에 대해 논할 자격이 없다. 고기도 못 먹는 놈들은 꺼져! 맛의 달인? 꺼져! 신의 물방울? 닥쳐!

중국인은 회를 못 먹는다. 그렇다면 역시 음식에 대해 논할 자격이 없다. 숟가락이 없으면 뜨거운 국물요리를 먹을 수 없다. 숟가락 없이 맨손으로 먹는 인도인은 당연히 요리를 말할 자격이 없다. 뭐든 식용유에 담가버리는 영국인은 애초에 주방 근처에 올 수도 없다.

미국과 프랑스를 비교한다면 미국은 숟가락도 있고, 고기도 먹고, 생선회도 먹고 별게 다 있는 것과 같고, 프랑스는 ‘음식은 맨손으로 먹어야 제맛이지’ 하면서 자의적인 규칙을 내걸어 스스로 제한을 걸어버린 것과 같다. 그건 허구적인 관념이고 가짜이며 속임수다. 그런건 누가 지어낸 환상이고 음식은 먹어본 사람만이 발언권이 있다.

안 먹어봤으면 닥쳐야 한다! 그런데 프랑스 철학은 안 먹어보고 음식을 논하는 자들이라 믿을 수 없다. 음식이든 문화든 디자인이든 음악이든 영화든 마찬가지. 안 먹어봤으면 닥쳐! 음식은 혀로 승부해야 하고, 영화는 그림으로 승부해야 한다. 설명 들어가면 가짜다. 내러티브는 필요없다. 그따위는 평론가를 먹여살리기 위한 밥그릇에 불과하다. 가짜는 빠져줘!

외국사이트에 많이 올라오는 엽기음식의 대표적인 예가 한국의 번데기다. 번데기를 역겨워 하는 그 자들 중에 먹어본 자는 없다. 안 먹어봤으면 닥쳐! 비유로 말하면 싸이의 유튜브 동영상을 보고 ‘저게 음악이냐? 웃긴 동영상이지.’ 하고 간단히 무시해 버린다면? 그거 말 된다. 그런데 강남스타일 진짜 음악 맞나?

그런 식으로 제 팔과 다리를 점점 잘라내면 왜소해지는 거다. 음악이 풍성해져야 하는데 점점 말라비틀어져서 사망한다.

철학의 의미가 의사결정능력의 향상에 있다면, 프랑스인은 의사결정능력을 키웠을까? 세월호와 같은 상황이 프랑스에서 일어난다면 과연 그 300명의 희생자 중에 철학으로 단련된 사람이 딱 나타나서 재빨리 그 300명을 구출했을까? 천만에. 나는 오히려 악랄한 미국놈이 잘난척 하는 프랑스놈보다 그 상황에서는 더 현명하게 의사결정을 한다고 본다. 입으로만 떠들지 현장에서는 못한다.

물론 그래도 한국보다는 낫다. 한국도 독재교육으로 조졌다. 궁궐에서 귀신이 나온다고 떠들었던 정신병자 광해군이나, 왕정복고로 앙시앙레짐을 실현한 영조와 정조 따위 쓰레기를 대단한 인물처럼 평가하는 썩어빠진 독재사관의 한국교육이니, 한국교육도 망했지만 프랑스교육도 망했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스포츠는 챔피언보디다. 전술이고 정신력이고 티키타카고 사기다. 그게 프랑스철학같은 거다. 우사인 볼트는 왜 잘 달리지? 몸을 봐라. 장미란은 왜 잘 들지? 몸을 봐라. 박병호는 왜 홈런을 잘 치지? 몸을 봐라. 몸에 답이 있다. 일단 몸에서 이기고 들어가야 진짜다.

드록바와 혼다를 비교해 보라. 하체는 비슷하다. 그러나 혼다는 상체가 빈약하다. 여기서 승부가 난다. 마라도나가 키가 작아도 상체와 하체가 고루 발달해서 단단한 차돌과 같다. 그 차돌의 덩치를 키워버리면 드록바 된다.

러시아는 왜 한국을 이기지 못했을까? 정답 - 키가 작아서다. 한국은 근래에 키로 재미를 봤지만 상체가 부실해서 안 된다. 진짜 고수라면 김연아 몸만 보고도 실력을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이영표 눈만 봐도 머리 좋게 생겼잖아. 딱 보면 표시가 난다.

이런걸 딱 보고 1초 안에 분간해야 세월호와 같은 긴박한 상황에서 단호한 의사결정은 가능하다. 당신이 승객을 구할 수 있는 골드타임은 길어야 5분이다. 5분인데 얼어죽을 프랑스철학인가? 바깔로레아는 4시간이다. 4시간이면 세월호는 이미 침몰하고 없다.

프랑스철학이 사기인 이유는 이렇듯 몸의 현장과 부딪히지 않는 즉 몸의 언어가 아닌 입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거 통째로 가짜다.

‘우리는 몸이 안 되니까 패스축구로 가보자?’ 망하는 거다. 물론 그것도 제한적인 효과는 있다. 우왕좌왕 하는 것 보다는 패스라도 하는게 낫다. 그러나 말이다. 축구를 모르는 사람에게 드록바와 혼다 사진을 딱 보여주고 누가 이길까 하고 물으면 5초 안에 맞추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보나마나 그 자는 프랑스인이다. 바깔로레아 하다가 바보가 된 것이다.

현장에서 자연의 실제와 상호작용하지 않는 프랑스 철학은 사기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다. 그런 철학도 안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투자대비로 보면 확실히 프랑스인의 의사결정능력을 하락시켰다. 그 시간에 마트에서 알바하고 거리에서 장사 한 사람이 더 의사결정능력을 향상시켰다. 여행가서 현지에서 삐끼하다가 도를 얻어버린 김어준처럼.

비유하면 프랑스철학은 학승만 있고 선승이 없는 셈이다. 입으로 운전면허 땄다는 거다. 일본요리와 같다. 메인요리가 없고 스끼다시만 계속 나온다. 입으로 하는 철학은 스끼다시에 불과하다. 일본요리는 메인요리가 없으므로 진짜배기 요리가 아니다. 진정한 눈으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진짜 철학은 세월호와 같은 긴박한 순간에 딱 5초 주고 의사결정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선승은 하지만 학승은 못한다. 예수는 하는데 신학은 못한다. 혜능은 하는데 신수는 못한다. 성철은 하는데 법정은 못한다. 어준은 하는데 신주는 못한다. 진짜는 하는데 가짜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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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kim

2014-06-18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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