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나라고 느끼는 주체의 의식이 확장된다 해도 나는 신체의 지배를 받는다. 높은 깨달음을 얻는다 해도 사고로 팔다리가 잘려나간다면, 마음의 평정심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신체의 힘 없이는 아무것도 해낼수 없다. 신체와 ‘나’의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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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의사결정의 주체다. 의사결정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신체감관으로 느끼는 감정의 신호을 단서로 삼으면 안 된다. 그것은 눈으로 보는 색깔처럼 바깥의 풍경에 불과하다. 나의 신체 역시 의사결정으로 보면 나의 바깥에 있다. 산이 푸르거나, 노을이 붉거나, 새가 노래하거나, 내 팔이 아프거나 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다만 고통이 심해지면 호흡을 방해하므로 힘들게 된다. 이 때는 진통제로 견디는 수 밖에. 그런데 사람들은 의외로 잘 견딘다. 암환자도 막상 닥치면 의연하게 극복해낸다. 전쟁이 일어나면 첫 날은 모두 패닉에 빠져버리지만 얼마가 지나면 태연하게 댄스를 추러 간다.(625때 고관대작의 부인들이 부산의 댄스홀에서 춤 추다가 걸려 신문에 대서특필.. 여럿 잘렸음.)
세월호가 침몰해도 눈에 쌍씸지 켜고 유족들 탓하는 새누리들처럼 인간은 환경변화에 잘 적응한다.
의사결정으로 보아야 한다. 기생충은 숙주에 의존한다. 근데 기생충이 왜 숙주 걱정을 하는가?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에 기생한다. 근데 소프트웨어가 왜 하드웨어 걱정을 하지? 자기 앞가림만 잘 하면 되는 거다. 나는 의사결정만 잘 하면 된다. 인생은 장기전이고 눈앞의 결과는 하늘의 뜻이다.
내가 잘 살았는데 도둑놈이 내 재산을 강탈했다. 인생을 실패한건 도둑인데 내가 왜 도둑걱정을 하지? 왜 도둑에게 분노하지? 도둑에게 ‘당신 인생을 그렇게 살면 안돼!’ 하고 충고하려 한다. 그건 도둑의 문제다. 내게는 확률로만 존재하는 데이터에 불과하고 보험처리하면 된다.
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인생을 장기전으로 살고 그런 고난을 확률로 대하는게 바로 보험이다. 보험회사와 관련없이 내 안에 보험이 있다. 평정심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 문제는 도둑의 소관이고 내 임무는 여기까지라는 한계를 그어주면 된다. 이웅종소장이 악벽있는 개를 쉽게 교정하듯 쉽게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다.
물론 기생충도 숙주의 일에 얼마간 신경을 써야하지만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니다. 인간이 고통스러운 것은 고통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대응할 매뉴얼이 없기 때문이다. 군에서 스트레스로 매우 고통을 받는 이등병이 있었는데 내가 한 마디 해주자 바로 해결되었다.
이등병은 원인모를 두통을 앓는데 마음의 긴장이 몸에 나타난 것이다. 그게 긴장 때문이며, 고참들이 이등병들을 긴장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강요하는게 있으며, 저게 다 필요한 행동이구나 하고 그 원리를 이해하면 스트레스가 사라지고 두통도 없어진다. ‘사흘 안에 중대원 80명 이름과 계급 다 외어.’ - 안 외어도 된다. 개겨! 마음을 정하는 순간 두통이 사라진다.
메시가 시합 중에 구토를 한 것도 팀플레이가 안 되기 때문이다. 팀플레이가 되면 팀이 긴장한다. 팀이 긴장하면 개인의 스트레스가 사라진다. 팀이 긴장을 안 하기 때문에 그게 전해져서 메시가 구토를 하는 것이다.
교사가 몽둥이를 들고 체벌을 위협하면 스트레스를 받지만 정작 엉덩이 맞고 나면 별로 아프지 않다. 50방 정도는 웃으며 버틴다. 집에 가서 누워자지 못하고 엎어져 자야 하는게 골치일 뿐.
신체는 영혼(의사결정 주체)의 좋은 친구일 뿐 그다지 걱정할 일은 아니며 괜히 쫄아서 겁내는 거다. 그런 걱정들은 세상 경험이 부족해서 생기는 거다. 내 몸만 신체가 아니고, 내 땅과 내 하늘과 내 자연과 내 사회와 내 역사가 모두 나의 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많은 고통은 사라진다.
의사결정을 잘 하는 거다. 내 임무를 잘 해낼 때 고통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