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소더스의 의미

어제 팟캐스트 녹음때 나온 이야기입니다.

나는 아직 이 땅에서 믿음있는 기독교도를 한 명도 보지 못했음을 유감으로 한다. 기독교도들은 믿음이라는 단어를 우리들과는 다른 뜻으로 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믿음은 신뢰를 뜻한다. 부모가 자식을 믿는다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신뢰하여 의사결정에 있어 재량권을 넘겨준다는 말이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믿고 곳간 열쇠를 맡긴다. 자식은 부모를 믿고 두 팔을 크게벌린 엄마의 품 안에 뛰어든다. ‘혹시 저 자가 나를 저녁 끼니로 잡아먹지 않을까?’ 하고 부모를 의심하는 자식은 없다. 그런데 동물 생태계라면 물고기가 입 안에서 새끼를 키우다가 삼켜버리는 일도 더러 있다.

토끼는 첫 출산으로 낳은 새끼를 잘 키우지 못한다. 신경과민이 되어 새끼를 물어죽이는 토끼도 있다. 그래도 새끼가 어미에게 저항하지 않는다. 나무는 겨울을 맞아 낙엽을 죽여 떨어뜨린다. 그럴 때 나무를 원망하는 잎은 없다. 그 잎은 흙으로 돌아가 거름이 되었다가 다시 나무로 올라간다.

만약 당신이 방 안 어딘가에서 백원 동전을 잃었다면, 그 동전은 방 안 어딘가에 있다. 그 동전은 여전히 당신의 재산으로 그곳에 있는 것이다. 오른쪽 호주머니에서 왼쪽 호주머니로 옮겨갔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없다. A에 없는 것은 B에 있다. 그러므로 걱정할 일이 없다. 그것이 믿음이다.

예수가 말한 믿음 역시 이와 같다. 예수는 하느님을 ‘아빠’라 불렀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부인한다. 그들은 하느님을 ‘주인’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예수의 길을 부인하고 다른 길을 선택했다. 기독교도가 말하는 믿음은 부모가 자신에게 물려주는 재량권을 부인하는 것이다.

노예는 주인에게 의사결정권을 위임한다. 스스로의 판단으로는 아무 것도 결정하지 않는다. 주인의 눈치를 보고 의중을 읽으려 애쓴다. 자기 의사를 삼가고 주인의 의사를 자기 의사로 삼는다. 이는 정확히 믿음과 반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도 중에 믿음 있는 자는 한 명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의사결정능력이 있느냐다. 무언가를 믿는다고 떠벌이고 다니는 사람은 보나마나 자기 안에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의사결정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쓸개 빠진 사람이 쓸개를 찾아다닌다. 그게 없기 때문이다. 자기 안에 사랑이 없는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떠들고 다닌다.

돈 없는 사람이 쩔그럭거리며 동전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 구태여 티를 내는 것이다. 본인에게 의사결정능력이 있으면 믿음이 있다. 믿음이 있으면 결정이 자유로워진다. 십일조를 내지 않아도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아는게 믿음이다. 실수를 저질러도 지옥에 안 간다는 사실을 아는게 믿음이다.

교회에 가지 않아도 지구가 이미 교회이니 신경쓰지 않는게 믿음이다.어제 저쪽에서 잃어버린 동전과 오늘 이쪽에서 찾은 동전이 같은 동전이듯이, 부모와 자식은 같기 때문이다. 물에 빠지면 제 목숨을 버리면서도 자식을 구하는 것은, 부모와 자식은 같은데 남은 수명은 자식에게 많기 때문이다.

세상에 자식의 성공을 질투하는 부모는 없다.아내의 성공을 질투하는 남편이라면 그 안에 사랑은 없는 것이다. 그 사랑이 충만되어 있느냐다. 동사로 표현되는 사랑하다 이전에 명사로 나타내는 사랑이 배터리에 완충되어 있어야 한다. 내 안에 믿음이 완충되어 있다면 추가배터리는 필요없다.

일요일마다 교회를 찾아 믿음을 재충전할 이유는 없다. 자신의 몸이 곧 교회이기 때문이다.인간의 잘못은 신의 잘못이며, 인간을 벌함은 신을 벌하는 것이니, 인간의 죄는 신의 죄다. 인간이 스스로 죄인을 자처한다면 그것은 신에게 죄를 지우는 행동과 같다. 그것은 믿음이 없는 자의 행동이다.

거짓 믿음을 버리고 진정한 믿음을 찾아야 한다.진정한 믿음은 신의 발견으로 시작된다. 인간은 언제 신을 발견하는가? 그것은 진정한 인간을 발견할 때다. 부모와 자식은 같으므로 만약 자식을 발견했다면 이미 부모를 발견한 것이다.떨어진 동전은 주변 어딘가에 있다. A에 없으면 B에 있다.

인간을 발견했다면 A를 발견한 것이며, A를 발견했다면 이미 B를 발견한 것이다. 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대는 이미 인간을 발견했는가? 발견하고 보니 그게 인간이 못된 일베충이라면 낭패가 아닌가? 어디서 인간을 찾으랴. 보통은 짐승과 인간을 비교한다.닭이나 돼지를 보고 인간과 비교한다.

돼지나 개보다 우월하니 인간이 아닌가 하는 식이면 실패다. 왜 인간이 짐승과 비교되어야 하는가? 짐승과 비교되고 있으면 이미 짐승이다. 그대는 짐승과 비교되지 않는 진정한 인간을 발견했는가? 신을 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의사결정으로 보아야 한다. 신의 의사결정을 발견했는가이다.

출애굽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리가 이집트를 떠난 것은 아니다. 가나안은 원래 이집트 땅이고 그 북쪽의 레바논도 이집트 땅이고, 시리아도 한 때는 이집트 땅이었기 때문이다. 이집트가 잘나갈 때는 시리아에서 튀니지까지 일대가 다 이집트 영토였다. 모세는 이집트인이다.

유태인이 홍해를 건넌 적은 없다. 갈대습지를 지나갔을 뿐이다. 이집트 군대가 유태인 무리를 추격한 흔적도 없다. 훨씬 전에 아케나톤이 처음 일신교를 만들었으며 후대에 와서 일신교 세력은 탄압받았다. 아케나톤의 아들 투탕카멘의 이름에서 보듯이 유태인들이 기도때 쓰는 ‘아멘’도 이집트어다.

출애굽 전후로 있었던 중대사건은 ‘바다 사람들’의 침략이다. 그들은 앗시리아와 이집트를 제외한 주변의 모든 나라를 멸망시켰다. 앗시리아와 이집트 또한 공격을 받아 영토가 축소되었음은 물론이다.전쟁은 영토와 포로의 획득이 목적인데 그 시기의 바다사람들은 그러한 분명한 목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네 땅에서 내쫓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포로를 잡아도 끌고갈 자기 영토가 없다. 그들은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며 파괴와 방화를 자행했다. 약탈을 해도 운반하여 가져갈 고국이 없으므로 약탈도 침략의 목적이 아니고, 오직 파괴를 위한 파괴만 일삼았던 것이다.

그들은 부단히 이동했으며이동에 방해가 되는 도시를 불태웠다. 그때만 해도 지구촌 인구가 다 합쳐서 1억 2천 정도에 불과하던 청동기 문명이었으므로 이런 일이 가능했다. 사람들은 도시에 살았고 도시의 규모는 작았다. 하이집트 인구가 다 합쳐서 60만에서 100만 밖에 안 되던 시절이었다.

그들은 하나의 민족이 아니고, 여러 민족들의 연쇄적인 이동이었으므로 침략을 해도 그곳에 정주할 수가 없었다. 다른 집단이 잇달아 밀려오곤 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유태인들도 터를 잡지 못하고 휩쓸려다닌 것이다. 바다사람들이 하나둘씩 정주하게 되자 이집트에서 독립하여 정주하였다.

출애굽이 아니라 탈애굽이라고 하는게 맞을 것이다. 이는 여러 사료를 종합한 대략적인 추정이다. 어떤 사료에도 바다 사람들의 실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임금도 없고 국가도 없고 체계도 없으므로 기록을 남길 수도 없다. 그들이 지중해의 청동기 광산을 없애버려서 철기문명이 일어났다.

인간을 어디서 발견할 것인가? 인간이 터를 잡고 정주하면 개체로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무리지어 이동할 때는 인간의 본질이 드러난다. 출애굽사건은 우리에게 강렬한 영감을 준다. 인간을 발견할 수 있는 단서다. 광장에서촛불시위를 할 때, 순례여행을 할 때, 인간의 원형의 모습을 포착하게 된다.

여럿이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보조를 맞추어 일제히 나아갈 때 인간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개체가 아닌 집단으로서의 인간이다. 인간의 고향은 집단이다. 인간은 고향에서 도시로 나온게 아니라, 자궁에서 아기로 나온게 아니라, 소년에서 어른으로 나온게 아니라 집단에서 개인으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교회를 찾는다. 교회에 그 집단이 있기 때문이다. 본래 집단에서 나왔기 때문에 다시 집단으로 돌아간다. 인간은 그 집단을 믿는다. 집단이 내게 이익이 된다는 타산의 믿음이 아니다. 아기가 문득 엄마가 있는 쪽을 돌아보듯이 모든 의사결정의 근거를 찾는 인간의 원초적 모습이다.

아기가 놀다가 두리번 거리며 엄마를 찾는 것은 그래야 마음이 놓이고 편안하게 놀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에게로 다가가는 것은 아니다. 엄마를 모든 의사결정의 소실점으로 정해놓고, 마음놓고 의사결정하기 위해서다. 이는 국가가 헌법을 정해놓고서야 마음놓고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것과 같다.

엄마가 곁에 있을 때 아기는 엄마를 잊고 편안하게 놀 수 있다. 헌법이 작동할 때 국가는 그 헌법을 잊고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 계속 헌법을 들추어보고 헌법재판소에 사건을 가져간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을 믿는다며 아침 저녁으로 교회를 찾는다면 이는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신이라는 개념은 의사결정단위로 기능한다. 가장 큰 집단에서 최고단위의 의사결정이 일어난다.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든 그대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울타리를 잡고 그 단위에서 의사결정하면 그것은 곧 신의 모습이다. 인간이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은 그 최고단위의 의사결정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 최고단위를 타자로 자신과 분리할 때 그것은 불신이 된다. 나를 떠난 신은 이미 신이 아니다. 신이 나를 떠나 저쪽에 있다면 나는 이미 버려진 것이다. 기독교의 신은 타자이며, 그것은 버려진 자의 신이다. 출애굽시대에 이집트로부터 버려졌다는 고통의 기억이 투영되었을지도 모른다.

인류는 한 배를 타고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항해한다. 그러나 종종 그러한 사실을 망각한다. 터를 잡고 정주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선장과 갑판원과 기관실이 하나였다. 그러나 순풍을 만나 지루한 항해가 계속되면 선장은 선장식구끼리 브릿지에 모인다.갑판원은 갑판원끼리 구석에 모인다.

기관실 사람은 기관실 안에 따로 모여서 고스톱을 친다. 그러다가 사나운 폭풍을 만나면 다시 얼싸안고 하나임을 확인한다. 가끔은 그렇게 배가 흔들려야 한다. 거센 폭풍이 몰아쳐야 한다. 큰 파도를 힘들게 넘어줘야 한다. 그래야 정신차린다.그 배 안에서 나와 타자의 구분은 있을 수 없는 거다.

폭풍을 만나 한 명이 살아남았다면 그 한명이 선장이면서, 기관장이면서, 갑판장이다. 인간이면서 신이다. 개체이면서 집단이다. 구분은 의사결정을 위한 편의에 지나지 않는다.결국 믿음을 가지려면 먼저 인간을 발견해야 하며 그 인간은 광장으로 나와 순례여행을 떠나면서 무리를 짓는다.

먼 길을 함께 갈 때 그 집단의 의사결정 중심에 섬으로써 비로소 인간은 획득되는 것이다. 대표성이 획득되고 존엄성이 획득된다. 진짜 인간은 짐승과 구분되는 영장류 인간이 아니라, 집단이라는 자궁으로부터 낳아진 인간이다. 집단의 의사결정 중심에 서서 대표성을 획득함으로써 존엄한 인간이다.

기독교는 기승전결로 이루어진 완전성의 원형을 가진다. 그것은 원죄≫추방≫대속≫구원이다. 이렇게 자체적인 완결성을 가진다. 원죄는 집단으로부터 배제된 것이다. 인간은 왕따가 되었을 때, 해고되었을 때, 고백을 거절당했을 때, 입시에 낙방했을 때, 병에 걸렸을 때 그러한 원죄의 상태가 된다.

그 지점에서 인간은 기승전결의 기에 서는 것이며, 거기서 사건은 일어나고야 마는 것이다. 원죄는 분리불안의 고통이다. 아기의 시야에 엄마가 보이지 않을 때의 고통이다. 그 집단이 사막의 유목민과 같은 유랑집단이면 그러한 원죄의 고통은 더욱 가혹할 것이다. 그러니 누구 죄없는 사람 있겠는가?

집시무리에서 쫓겨난 소녀집시의 운명과도 같다. 예수게이가 죽고 부족에서 쫓겨나 홀로 남겨진 징기스칸의 어머니 허엘룬 무리와 같다. 사막의 베드윈만이 이해할 수 있는 절대고통이다. 원죄는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실존적 사건이다. 구원은 다시 무리를 찾아 집단의 의사결정 중심에 서는 것이다.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원초적 두려움은 바로 그것이다. 유목민 무리가 텐트를 걷어 새로운 목초지로 이동하였는데, 바위뒤 구석에서 늦잠을 자다가 무리를 잃고 사막을 헤매이는 그런 그림이다. 인간이 정주생활을 한 것은 농경이 시작된 이후의 일이며 그 전에는 사냥감을 찾아 끝없이 이동했다.

불교의 기승전결 완성형은 고≫집≫멸≫도다. 기독교의 원죄나 불교의 고나 본질은 같다. 생로병사는 그다지 고가 아니다. 진정한 고는 다들 떠나고 홀로 남겨지는 것이다. 돌사막의 바위틈에 버려지는 것이다. 환자라고 해서 버려지고, 장애인이라고 해서 버려지고, 귀신들렸다고 해서 버려진다.

식량이 부족하다고 해서 버려지고, 아이를 못 낳는다는 이유로 버려지고, 사냥을 못한다는 이유로 버려진다. 인간은 온갖 이유로 무리에서 버려지고 배척된다. 유전자에 각인된 무서운 고통이 거기에 있다. 그럴 때 무리를 찾아 엄마품에 뛰어드는 아기처럼 울면서 뛰어드는 것이 깨달아야 할 도다.

마르크스의 기승전결은 소외≫착취≫투쟁≫해방이다. 패턴은 같다. 이렇듯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구조를 가지면 먹힌다. 기승전결이 동그랗게 말려서 입자를 이루고 이는 무한복제된다. 왜냐하면 모두에게 무리에서 쫓겨날지 모른다는 근원의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구조론의 기승전결 역시 같다.

소승이 극복해야 할 고립이고 대승이 이루어야 할 해방이다. 다시 무리를 찾아 넉넉한 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인간을 발견해야 한다. 믿음은 그 인간 무리에 대한 믿음이다. 비록 낙오되어 대오에서 이탈했을지라도 터벅터벅 걸어가면 부대를 만날 수 있다. A에 없는 것은 B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믿는다’는 식의 말은 거짓말입니다. 믿음은 배터리에 충전된 전기와 같이 저절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구태여 스위치를 켜지 않아도 자동으로 전구에 불이 들어올 것이며, 믿음이 고갈되면 아무리 스위치를 눌러도 전구에 불은 들어오지 않습니다. 집단의 대표성을 가지는 것, 개인이 집단을 대표하는 의사결정능력을 가지는 것이 정답입니다. 개가 낳으면 무슨 짓을 해도 개일 것이고, 사람이 낳으면 무슨 짓을 해도 그 자는 사람입니다. 과연 사람이 낳았는가? 과연 개인이 집단을 대표하여 집단에서 나왔는지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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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kim

2015-01-07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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