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일한다. 정신은 일거리를 찾고, 의식은 생선을 도마에 올리고, 의도는 칼로 생선을 내려치고, 생각은 일을 반복하고, 감정은 결과를 보고한다. 감정은 어디에 보고하는가? 천하에 보고한다.
감정의 피드백은 하부구조에서 일어난 일을 상부구조에 보고하는 것이다. 우선은 자신의 정신에 보고한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감정은 실상 내 마음을 온 세상에 보고하려는 것이다. 나의 슬픔을 천하가 같이 해주기를 바란다. 그렇다. 천하에 보고하면 된다.
우리는 막연히 행복을 추구하지만 실패한다. 만약 그대가 행복감을 느꼈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일어난 일을 뇌가 세상에 보고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대의 행복은 그대에게 일어난 일을 이웃들에게 알리라는 신호이며, 그럴 때 알릴 친구가 없다면 그대는 우울할 수 밖에 없다.
현대인이 불행한 이유는 자신의 마음을 누구에게도 알리지도 않으면서 무리하게 행복을 찾으려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율배반이다. 자신의 뇌에 대한 반역이다. 어차피 알릴 것도 아니면서 알릴만한 소식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행복찾기 노력은 억지에 불과하다.
지금은 사회가 잘게 쪼개졌지만 인간은 원래 부족민으로 태어났다. 원시 부족의 규모는 많아야 수십인이다. 당신이 기쁨이나 슬픔을 느낀다면 그것을 주변 30여명에게 알려야 한다. 그것이 당신의 뇌에 새겨진 유전자의 명령이다.
기쁨도 알려야 하고 슬픔도 알려야 한다. 기쁨 그 자체는 인간의 목적이 될 수 없다. 그것을 주변에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만들어졌다.
보수꼴통들은 곤란하다. 그들은 천하를 적으로 설정했으므로 천하에 보고할 수가 없다. 적군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는 없는 것과 같다. 천하인이 되고서야 감정의 문제를 진정으로 극복할 수 있다.
두려움도, 슬픔도, 괴로움도, 내 마음을 세상에 알리려는 목적이라면, 내가 천하와 하나가 되었을 때 자연히 해결된다. 세상과 내가 24시간 연결되어 있다면, 천하의 마음과 내 마음이 연동되어 있다면 굳이 알리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알려져 있다.
그렇다. 감정은 세상과 하나가 되라는 명령이다. 하나가 되었다면 구태여 알리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나, 하나가 되지 않았다면 알려야 한다. 명상을 하는 목적은 세상과 내가 연결되어 하나가 됨으로써 구태여 알리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마음의 답은 바깥에 있다. 눈 감고 앉아있는건 바보 짓이다. 사유의 절대량은 많아야 하지만 그것을 격발하는 방아쇠는 바깥에 있다. 책을 읽든, 여행을 하든, 농사를 짓든, 영화를 보든 수백가지 에피소드가 뇌에 주입되어야, 비로소 머리 속이 와글거리면서 명상을 해도 시스템이 작동한다.
제대로 생각이 되어준다. 세상과 강력하게 연동되어 톱니가 맞물려 돌아간다는 느낌이 든다. 앉은 자리에서 꼼짝 않고 다섯시간을 흥분된 상태로 있게 된다. 밥 먹을 시간도 아깝게 되고, 화장실 갈 시간도 아깝게 된다. 세상의 마음과 내 마음이 연동되어 반응한다면 말이다. 좋은 음악을 듣다가 중간에 자를 수 없는 이치다.
유교주의 교육을 받은 점잖은 한국사람이 불행한 이유는 자신의 상태를 절대 남에게 알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행복하다고 자랑하는 부탄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상태를 언제라도 이웃 30명과 공유하고 있을 것입니다. 한국인이 절대로 알리지 않으면서도, 티나게 알리는 방법은 돈을 벌어서 이웃과 차별화 하는 것입니다. 티를 내면 알리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상태를 알리지 않는 한국인의 관습상, 당신이 아무리 돈을 벌어 유난을 떨어도 이웃이 알아챘다는 의사표시를 절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들은 계속 불행할 수 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