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일원론을 배우라.
구조론은 이원론을 버리고 일원론을 취한다. 어떤 둘에는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에너지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 조약돌 두 개가 있다고 치자. 거기에 무슨 에너지가 있겠는가? 흑돌과 백돌이 있다고 치자. 아무런 에너지가 없다. 에너지는 한 판의 승부에 있다. 바둑돌은 둘이라도 그 판은 한 판이다.
에너지는 공간에 없고 시간에 있다. 공간은 동서남북이 대칭을 이루므로 2지만 시간은 비대칭 1이다. 과거는 이미 떠났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시간은 오직 현재가 있을 뿐이므로 일원론이다. 공간에는 개체가 있다면 시간에 무엇이 있는가? 시스템이 있다. 시스템은 모두 연결되어 하나로 있다.
너와 나라는 구분을 극복해야 한다.인류는 70억의 개인들이 모인 공간의 집합이 아니라, 300만년 동안 시간 상에서 줄기차게 성장해온 한 그루의 큰 나무다. 시간은 강물처럼 흐른다. 시간의 강물은 바다에 이르러 다 합쳐진다. 인류의 존재 목적은 그 300만년에 걸친 거대 프로젝트의 완성에 있다.
판단하려면 300만년 역사, 70억 회원을 가진 거대 프로젝트의 대표자 마음을 얻어야 한다. 세상은 작은 원자의 집합이 아니라 큰 시스템의 복제다. 말은 내 입으로 하더라도 내 입장의 소개가 아니라 그 시스템의 입장을 소개하는 것이다. 내 생각을 말하는게 아니라 인류생각에 내 입장을 끼워넣는다.
당신의 첫 번째 생각은 이원론이다. 왜?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사회의 눈치를 보도록 뇌가 세팅되어 있다. 농부가 밭에서 딴 과일을 포장해서 팔 듯이 일원론으로 바꾸는 절차를 거쳐야 발언권이 있다. 시를 쓰든, 소설을 쓰든, 그냥 떠오르는 자기 생각은 아직 팔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혹돔은 모두 암컷으로 태어나는데 자라면서 일부의 성이 수컷으로 변한다. 이마에 없던 혹이 생겨나는 것이다. 무리에 수컷이 없으면 몸집이 가장 큰 암컷이 수컷으로 변하는 식이다.(위키백과) 혹돔이 자기 생각대로 혹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변 눈치를 보고 혹을 만들어낸다는 점이 각별하다.
‘나 아니면 없네.’ 해서 하는 것이다. 집단 중에서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하는데 할 사람이 없으면 내가 하는 것이다. 인간의 무의식은 대개 이 원리에 의해 작동한다. 자기 생각으로 믿지만 보이지 않게 집단의 의지가 작용한다. 인간은 다 암컷으로 태어나지만 지도자는 수컷으로 바뀐다. 물론 비유다.
인간은 모두 이원론자로 태어나지만 지도자는 일원론으로 바꾼다. 예수는 그렇게 했다. 자신을 리더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 상황에서 자신이 아니면 나설 사람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훈련된 사람은 머리를 굴려 판단하지 않아도 무의식에 의해 자연히 몸이 그렇게 움직인다. 뇌 안에서 작업한다.
노무현은, 백범은, 윤봉길은, 유관순은, 이순신은 그런 사람이다. 무의식에서 뇌가 작업하여 호르몬을 분출하므로 그 상황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몸이 견디지 못한다. 앓는다. 결국 집단을 위해 할 일을 하게 된다. 평소에 충분한 사색으로 자신을 단련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순간의 판단이 아니다.
일생동안 보고 듣고 느낀 것이 뇌 안에 축적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에 그쪽으로 결론을 내리고 거기에 걸맞는 호르몬을 생산하는 것이며 이후 몸이 괴롭게 된다. 사는게 죽는 것보다 괴롭게 느껴져서 자신을 희생하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예수도 그랬고 노무현도 그랬고 역사의 많은 영웅들도 그랬다.
집단을 이끄는 지도자가 아니라도 부모가 되면 자연히 일원론이 된다. 문제는 가족 안에서 부모라도, 사회에서는 어린이라는 거다. 자식을 키우려면 일원론으로 사유할 수 밖에 없다. 이원론의 포지션을 들키면 자식이 말대꾸를 하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부모가 자신을 남으로 취급하면 금방 눈치챈다.
아무리 친절하게 말해도 친부모가 아니면 어린이는 어리광을 부리지 못한다. 자신도 모르게 느끼는게 있다. 웃는 얼굴을 해도 어색하다. 분위기 깨졌다. 수습이 안 된다. 훈련하면 해결되지만 문제는 그게 훈련해야 하는 상황임을 깨닫지 못하는 거다. 입양할 때 전문가로부터 교육을 받고 해야 한다.
이원론은 타자를 생산해낸다. ‘쟤는 동성애자야. 쟤는 유태인이야. 쟤는 다문화야. 쟤는 흑인이야. 쟤는 충청도야.’ 사탄을 발굴하고 집단에 보고하도록 뇌가 설정되어 있다. 사탄이 없어도 사탄을 만들어내야 한다. 민방위 훈련과 같다. 적이 침입하지 않아도, 적이 침입해 있는 척 해야 훈련이 된다.
왜 그러한가? 그것이 지도자 혹돔이 아닌 일반 혹돔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원래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인간은 서로 차별하고 증오하면서 집단 내부에 강한 긴장상태를 유지하는 방법으로 집단의 결속을 유지하고 살아가게 되어 있다. 군대 내무반이라도 군기가 느슨해지면 반드시 사고가 일어난다.
총알 짱박아서 그걸로 짤짤이 하려는 무개념 일병은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갈림길이 있으면 그냥 오른쪽으로 가면 된다. 혼자가기 싫다. 동료를 규합해야 한다. ‘왼쪽 길에 사탄이 있어. 내가 봤거든.’ 이렇게 이야기를 꾸며내고 결국 갈 길로 간다. 그냥 가면 되는데 꼭 거짓말 해서 깃발 세우고 간다.
동료와 함께 가도록 인간은 진화해왔기 때문이다. 이원론이 인간의 사회성을 만들어낸다. 차별하고 경쟁하고 복종하고 추종하고 증오하고 이간질하고 음모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러면서 인간은 서로를 긴밀한 사이로 만들어 간다. 집단 내부에 강하게 에너지를 거는 것이다. 사회의 작동방식이다.
사자는 집단생활을 하므로 이원론자이고, 호랑이는 단독생활을 하므로 일원론자다. 사자는 암수를 차별한다. 사자의 사회는 불평등하다. 호랑이는 차별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자가 더 진화된 종이다. 유전자 조사해보면 딱 나온다. 그런데 사자는 원래 차별하더라도 우두머리 사자는 차별을 삼가야 한다.
우두머리가 차별하면 불안심리를 들킨다. 영웅호색이라 하지만 사실은 그게 불안심리를 들키는 거다. 인간은 불안할 때 여자를 찾거나 마약을 찾는다. 우두머리가 자신과 똑같은 이원론자, 차별주의자, 인종주의자라는 사실을 알아챌 때 사람들은 ‘저 우두머리 끌어내릴 때가 되었구나’ 하고 알아챈다.
진리는 일원론이다. 대중은 비진리의 포지션에 서고 지도자는 일원론의 포지션에 섬으로써 집단이 유지된다. 대중이 “쟤들이 나빠. 때려잡자.” 하고 소동을 피우면 지도자는 “어허! 그만두지 못할까? 촐싹대는 녀석들 같으니라구.” 하고 꾸지람을 하는 역할이다. 근데 한국은 지도자가 폭력을 선동한다.
지도자가 ‘때려잡자 종북이!’ 이러고 있다. 자신을 지도자로 여기지 않는 거다. 이미 들켜버렸다. 원래 인간사회의 작동원리는 이러하지만 이건 부족민으로 지구에 온 호모 사피엔스의 모습이지, 21세기 문명사회 현대인의 모습은 아니어야 한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태어났지만 언제까지 그러고 살거냐고.
지금은 과학의 시대이다. 모두가 지도자여야 한다. 70억 인류가 모두 지도자의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못하겠다고? 그래도 한국인은 해내야 한다. 왜? 그것 말고는 먹고 살 방법이 없다. 미국과 일본과 중국이 사방에서 조여오는 판에 어떻게 살래? 한국인 당신들 앞으로 뭐해서 먹고 살래? 방법이 없다.
한국은 운명적으로 지도자의 포지션에 서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게 되어 있다. 지정학적 구조가 그렇다. 해양문명과 대륙문명이 만나는 접점에 위치해 버렸다. 바퀴축이 되어 모두를 조율하거나 아니면 가운데서 낑겨 죽거나다. 북한은 낑겨 죽는 길을 가고 있다. 한국도 북한 가는 길을 따라갈 거냐고.
남의 눈에 티는 잘 보는데 자기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는게 인간이다. 그 들보가 무엇인가? 관점이다. 구조론은 살이 아니라 뼈를 본다. 사람이 살은 잘 바꾸나 뼈를 바꾸지는 못한다. 그게 잘 안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뼈를 바꿀 수 있다. 자신을 약자로 설정하고 상대방을 타자로 여기는게 이원론이다.
그렇게 대립각을 세워야 머리가 팽팽 돌아가서, 집단 안에서 자기 역할을 찾는게 인간이다. 그러나 그 이원론적 관점으로는 진리를 수 없다. 부지런한 꿀벌의 역할은 해낼 수 있으나 여왕벌의 역할은 못 한다. 자기 내부에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분별을 부정하는 일원론 관점으로만 조달된다.
이원론적 관점이 내 눈의 들보다. 구조론으로 말하면 어떤 한 단계를 거칠때마다 5배 복잡해지고, 5배만큼 짚고 넘어가야할 의사결정사항이 많아진다. 사건 전체를 완전히 판갈이 하려면 3125개 사항을 새로 설정해줘야 한다. 스마트폰을 새로 구입해도 설정할게 꽤 많은데 깨달음이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교육받은 문명인이므로 그걸 건너뛴다. 설정을 안 하고 넘어가도 대략 탈이 없다. 왜인가? 학교에서 배워둔게 있으니까. 그래서 어려운 일을 쉽게 여긴다. 그래서 작은건 잘 하는데 결정적인 것을 못한다. 살은 잘 바꾸는데 뼈를 못 바꾼다. 야구선수가 폼을 바꾸면 쉽게 되는 수가 있다.
이대호가 갑자기 홈런을 잘 치는 비결은 폼을 수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폼을 안 바꾸고 야매로 어떻게 하니까 며칠 되는듯 하다가 도루묵 된다. 될듯될듯 안 되는 이런 사태다. 쓸 근육을 놔두고 옆근육을 빌려 쓰면 며칠은 되다가 탈이 난다. 김성근급 전문가한테 레슨을 받으면 바로 해결이 된다.
그런데 트레이너가 옆에서 지켜보지 않으면 무심코 옛날 방식으로 돌아가 있다. 넥센에는 이지풍 코치가 지켜보고 있는데 다른 야구팀에는 없다. 정치든 사회든 프로의 세계를 모르는 아마추어들이 문제다.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전문가의 레슨을 거부하고 고집피우는 거다. 지금 새정치가 그러하다.
걸핏하면 정당개혁 타령하면서 아직 폼을 안 바꾸었다. 정동영이 당대표 하던 시절의 그 폼이다. 안철수, 김한길이 당대표 하던 시절의 그 폼이다. 새누리는 불리하면 폼을 바꾸고 별짓 다 하는데 새정치는 왜 폼을 안 바꾸냐고? 원체 뼈가 굵은 이대호도 바꾸는데 새정치 지들은 무슨 용가리 통뼈인가?
한겨레나 오마이도 마찬가지다. 지들은 맨날 조중동에게 깨지면서 문재인이 한 번 졌다고 별 소리 다한다. 왜 한겨레, 오마이는 맨날 깨지면서 폼을 안 바꾸냐고? 그거 좀 바꾸면 어디가 덧나냐? 지들이 무슨 롯데 프런트라고 옛날 방식 고집하느냐고? 세상은 빠르게 바뀌는데 한겨레는 넘 보수적이다.
관점을 바꿔야 폼이 바뀐다. 내 눈에 들보를 빼야 관점이 바뀐다. 그럼 이게 확실히 빼야 할 들보라는 사실을 어떻게 납득시키느냐? 교육받지 않은 부족민을 데려오면 된다. 부족민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여러가지 일들이 매우 어렵다. 돌도끼 쓰는 부족민에게 쇠도끼 가져다줘도 못한다. 도루묵이 된다.
옆에서 가르쳐주면 5분 안에 다 배우는데 자리 비우면 다시 원래대로다. 부족민에게 자동차 운전을 가르치는데 3개월이 걸려도 실패다. 안 되는 거다. 그런데 한국인도 한 때는 그런 부족민 위치였다. 구한말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의 기록에는 조선인은 아무리 가르쳐줘도 안 된다는 식의 내용이 많다.
중국인 비하는 더 많다. 중국인은 300년 전부터 서구문명과 활발하게 접촉했는데 그 3백년간 도무지 배운게 없다. 모택동이 판을 흔들어 놓자 비로소 바뀌기 시작했다. 모택동이 15년 만에 영국을 따라잡는다고 큰소리치자 흥분한 중국인들이 갑자기 관점을 바꾼 것이다. 들보를 빼고 세상을 발견했다.
MBC TV에도 나왔지만 아마존 부족민 아저씨들이 1년째 알파벳을 배우고 있는데 아직도 실패 중이다. 부족민과 문명인은 큰 차이가 있다. 마음이 순수한 부족민 초딩은 3분만에 배우는 것을 마음이 오염된 부족민 어른은 건성으로 배우니까 3년 지나도 못한다. 서양인도 중국의 한자를 못 배운다.
한자를 중국인은 금방 배우고, 한국인은 겨우 배우고, 서구인은 진짜 못 배운다. 그래서 한국에 희망이 있는 것이다. 서구인은 한자를 글자가 아닌 그림으로 여기므로 머리에 입력이 되지 않는다. 뇌가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사실은 건성으로 배워서 그런 것이다. 입장이 바뀌면 백인이 부족민 신세다.
우리는 교육받은 문명인이라서 어려운 일을 쉽게 해내므로 문제를 너무 안이하게 수박겉핥기로 보고, 대충 넘어가려다가 핵심을 놓치게 되고, 그래서 되다가 안 되는구나 하고 본질을 깨달아야 한다. 권투든 야구든 골프든 모두 폼이 있고 밸런스가 있고 원리가 있다. 보통 밸런스라는 핵심을 놓친다.
밸런스를 놓치면 옆근육을 빌려쓰고, 옆근육을 쓰면 아프고, 아프면 자기도 모르게 동작이 바뀌어 있다. 하나의 동작에는 반드시 두 번 방향을 바꾸는 절차가 있다. 문제는 프로야구 역사가 백 년이 넘었는데도 서건창이 새로 폼을 만들어내야 할 정도로 인간들이 도무지 이 방면에 무지하다는 거다.
도대체 메이저리그의 날고 긴다 하는 고수들이 백년 동안 뭘 했냐고? 사실 한 것이 없다. 한국 프로야구만 해도 최근에 변화구의 종류가 늘어났고 투수의 구속이 빨라졌다. 혁신은 계속 일어나고 있다. 천하의 김성근도 잠시 현장을 떠났다는 이유로 흐름을 놓치고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다 이유가 있다.
천하의 강정호도 추신수가 궤적 보고 치는 법을 알려줘서 그 정도 치는 거다. 프로야구 코치들은 다 아는거 아니냐고? 아니다. 체력 키우는 방법은 넥센의 이지풍 트레이닝 코치 혼자만 알고 있다. 건성으로 아는 것과 제대로 아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가 있다. 아령을 들어도 전문가의 방법은 다르다.
스마트폰 새로 사고도 설정을 새로 하지 않고 그냥 쓰는 사람 많다. 그 사람들은 핵심기능을 쓰지 않지만 자신이 기능을 못 쓰고 있다는걸 모른다. 그러면서 뭐 갤럭시폰이 다 그렇지 그러면서 폰 탓을 한다. 그러나 진실은 나이가 많아서 귀차니즘 발동, 초딩이라면 벌써 했을 설정을 안 해놓은 거다.
초딩의 마음이 아니면 진리를 볼 수 없다. 자신이 얼마나 교만해져 있고 비뚤어져 있는지 봐야 한다. 내 눈에 심어져 있는 대들보를 빼자. 한국인이 오지게 정신차린 것은 625 때문이다. 다양한 외국인을 인종별로 구경하고서야 눈이 떠진 거. 일본인들은 한국보다 먼저 깨었지만 아직 정신 덜 차렸다.
북한도 다양한 외국인을 못봐서 아직 쫄아 있다. 중국인도 모택동이 호연지기 길러주기 전에는 비겁한 자세였다. 천하인의 마음을 품어야 답이 나온다. 인간은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이 갑의 입장이 되어야 변한다. 일본이 갑, 조선은 을
진리는 일원론입니다. 인간은 오른쪽 아니면 왼쪽이지만 진리는 양쪽 다입니다. 인간은 나 아니면 너지만 진리는 나도 없고 너도 없습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거는 방법으로 생각을 하지만, 진리는 작가가 등장인물끼리 대화시키는 방법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진리의 마음, 작가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광수생각은 불필요.내 생각 말하지 말고 인류생각을 말하십시오. 저 역시 느낀 것을 쓰는게 아니라 구조론이 가는 길을 뒤쫓아가기에 급급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