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측자 VS 연출자**
세상은 작은 알갱이의 집합으로 이루어졌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정보는 어디에 있을까? 어느 부분을 통제하면 인간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구조론은 정보를 A에서 찾는다. B에는 정보가 없다. A를 보느냐 B를 보느냐에 따라 이후 가는 길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래서 깨달음이 필요하다. A를 보는 관점은 연출자 포지션이다. B를 보는 관점은 관측자 포지션이다. 깨달음은 B를 보는 관측자 포지션을 A를 보는 연출자 포지션으로 바꾸는 것이다. 포지션을 바꾸면 세상이 보인다.
A는 질이고 B는 입자다. 질은 에너지다. 입자 중심적 사고를 에너지 중심적 사고로 바꿔야 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 집은 모여서 커진다.
◎ 길은 뻗어서 커진다.
비유하면 A는 길이고 B는 집이다. 세상은 집의 집합이 아니라 길의 전개다. 집은 모여서 도시를 이루지만, 길은 뻗어나가서 도시를 이룬다. 무엇이 다른가? 길은 외부와 연결하는 촉수가 둘이다. 집은 하나다. 길은 반드시 입력과 출력이 별도로 있다.
입으로 들어가서 항문으로 나온다. 그러나 집은 입구가 하나다. 대문으로 들어가서 대문으로 나온다. 집은 최소단위가 1이지만 길은 최소단위가 2다. 양자론과 같다. 길은 언제나 짝수로 존재한다. 길은 왕래往來한다. 가는 왕往과 오는 래來가 세트를 이룬다. 왕往만 있거나 래來만 있는 길은 없다. 반드시 대칭되어 있다.
대칭은 2다. 비대칭은 1이다. 길은 입력과 출력 두 포지션을 가지므로 대칭이지만 동시에 1이다. 도시 둘 사이에 길은 하나다. 하나이면서 둘이다. 대칭이면서 비대칭이다. 나무는 땅과 태양 사이를 연결하는 길이다. 땅의 물과 태양의 빛을 합성하여 자신을 연출해낸다. 땅과 태양의 대칭으로 2지만 나무의 성장방향은 1이다. 나무는 언제나 땅에서 태양으로 간다. 영양분은 반대로 잎에서 조직되어 뿌리로 간다. 대칭이면서 비대칭이다.
구조는 만나서 일한다. 만나면 2지만 일하면 1이다.
길은 2다. 가는 길은 있어도 오는 길은 없다? 그건 길이 아니라 막장이다. 방향은 1이다. 길은 언제나 중심에서 변방으로 뻗어나간다. 그대의 눈에는 세상이 길의 연결로 보이는가 아니면 집의 집합으로 보이는가?
인체의 혈관은 길이다. 신경계도 길이고 임파선도 길이다. 뇌는 뉴런이라는 길의 집합이다. 몸통은 입에서 항문까지 길이다. 집도 내부를 들여다 보면 방과 방을 잇는 길이다. 세상에 길 아닌 것은 없다.
세상은 의사결정단위의 집합이다. 의사결정단위는 쪼개지지 않는 알맹이가 아니라 쪼개고 합치기를 결정하는 길이다. 하나의 사람은 하나의 길이다. 모든 존재는 무언가를 연결하기 위해 존재한다. 길은 나아가므로 동動이고 집은 머무르므로 정靜이다.
관측자 포지션에서 연출자 포지션으로 갈아타십시오.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관측자는 돈을 지불하므로 1이고 연출자는 돈을 벌어들이므로 2입니다. 관측자는 집에 있고 연출자는 길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