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좋은 사람이다.

예수는 좋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말은 좋은 말이다. 가장 좋은 말은 내가 하느님이라는 거다. 내가 하느님을 구성하는 일부라는 거다.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거다. 물리적으로는 이격되어 있지만 ‘의사결정’으로 보면 연결되어 있다. 의사결정구조를 같은 것으로 쓴다는 의미다. 그것이 복제원리다.

신을 복제한 것이 인간이다. 이는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다. 종교의 용어를 쓰면 ‘영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하드웨어적 측면, 곧 유물론적인 측면은 논외다. 방송국과 라디오의 관계처럼 물질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영적으로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종교의 입지가 있는 거다.

이런건 말 안 해도 안다. 누구라도 안다. 위험을 만나 엄마가 자신을 희생해서 자식을 구하는 것은 물질적인 작용이 아니다. 의사결정으로 보면 부모와 자식은 하나다. 그러므로 예수는 신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이다. 친자확인 하자고 덤비면 곤란하다. 물질로 보는 태도라면 곤란하다. 의미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말이다. 종교인들은 유물론의 잣대로 예수의 친자여부를 논한다. 국과수에서 DNA 검사 해봤더니 하느님의 친자가 맞더라는 식이다. 이는 믿음이 없는 태도다. 왜 종교인이 종교를 부정하는 유물론의 방법을 앞세우느냐 말이다. 권세 때문이다. 본질은 대표성이다. 역시 의사결정에서의 대표성이다.

하느님의 아들이냐 아니냐 하는건 하느님의 대표성이 있느냐는 말이다. 개나 소나 다 자기가 하느님 아들이라면서 신의 대표성을 주장하면 목사의 입지가 위태롭다. 교회의 존립근거가 소멸된다. 도무지 통제가 안 된다. 인간들이 도무지 말을 들어먹지를 않는다. ‘제발 말 좀 들어라. 인간들아!’ 이거다.

아들은 아버지를 대리하여 대표성을 가진다. 이것이 의미로 보는 것이다. 권리관계로 보아야 한다. 양자를 들였더라도 가문을 승계하면 친자와 같은 대접을 하고 비록 친자라 하더라도 관계가 파탄나면 남남이 되는 것이다. 부부관계라도 마찬가지다. 돌아서면 바로 남남이 된다. 유전자 따위는 필요없다.

◎ 영적으로 보는 것은 의미로 보는 것이요, 의사결정으로 보는 것이요, 대표성으로 보는 것이다. 연결된 전체로 보는 것이다.

대표성이 본질이다. 신의 의사결정을 대리하는 자가 신의 아들이다. 교회의 천국타령, 지옥타령, 원죄타령은 군중을 통제하는 기술에 불과하다. 군중을 통제할 의도를 가지는 즉 타락이다. 문제는 지성이냐다. 최고의 지성이라야 발언권이 있다. 그런데 교회만 논외다. 교회는 원래 아무나 떠드는 곳이다.

인간을 통제하는 방법은 둘이다. 하나는 장을 선발하는 것이다. 똑똑한 사람을 선발하여 특별히 발언권을 준다. 집단 내부에 만인장, 천인장, 백부장을 임명하여 편제를 두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혼란을 조성하는 것이다. 난장판을 만들면 인간이 통제된다. 집단에 질서를 제거하면 질서가 만들어진다.

교회는 후자의 방법을 쓴다.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군중은 결국 한 방향으로 가게 된다. 기세와 흐름을 따르게 된다. 이 수법은 초반에 먹히지만 반드시 역효과가 난다. 방향전환이 안 된다. 속도조절을 못 한다. 관성의 법칙에 따라 한 방향으로 폭주하게 된다. 나치의 돌격대처럼 절망을 향해 직진한다.

메뚜기떼의 이동과 같다. 메뚜기는 제멋대로 가지만 숫자가 많아지면 충돌하게 되고, 충돌을 피하다보면 결국 모두가 한 방향으로 이동하게 된다. 누구도 메뚜기떼의 이동을 멈출 수 없다. 집단의 가장 어리석은 자에게 권세를 주면 이렇게 된다. 지금 트럼프가 쓰는 수법도 대중의 무지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사회갈등은 이 두 가지 전략 사이에서 일어난다. 진보는 지식으로 차별하고 대신 돈으로는 평등하고자 한다. 반대로 보수는 돈으로 차별하고 지식은 하향평준화 시키려 든다. 보수는 진보 때문에 돈으로 하향평준화 되었다고 주장하고 진보는 보수 때문에 지식으로 하향평준화 되었다고 주장한다.

승부는 외부와의 비교에서 난다. 외국보다 더 돈이 많은가 혹은 외국보다 더 지식이 많은가이다. 외국보다 돈이 많으면 보수가 잘한 것이고, 외국보다 지식이 많으면 진보가 잘한 것이다. 종교는 초반에 지식보급을 경쟁력으로 삼았지만 지금은 돈을 보급하는 걸로 경쟁력을 삼는다. 종교의 입지는 약해졌다.

종교가 돈이 되던 시절은 지났기 때문이다. 포지션이 엉켰다. 과거엔 무신론자가 물질을 근거로 삼았는데 지금은 종교가 물질을 근거로 삼는다.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로 보고, 물질이 아닌 영적으로 보는 관점이 종교의 전유물일 수 없다. 지식의 입장에서도 역시 의미로 보고 의사결정으로 보아야 한다.

필자의 주문은 군중심리를 쓰고, 집단의 방향성을 쓰는 종교의 수법을 떠나 의사결정 메커니즘으로 보는, 지식의 차별로 보는, 깨달음의 관점을 얻으라는 것이다. 원래 깨달음은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를 막론하고 중요한 근거였다. 지금은 모든 종교에서 깨달음을 배척하고 유물론의 관점을 휘두르고 있다.

석가가 깨달아서 몸에 어떤 물질적 현상이 생겼다는 식은 최악이다. 석가가 외계인이 되어버렸단 말인가? 인간에서 더 진화해서 해괴한 종으로 변했단 말인가? 바보같은 생각이다. 깨달음은 석가의 내부에서 일어난 깨달음 사건이 아니라 깨달음 내부에서 일어난 석가의 사건이다. 깨달음이 주인공이다.

깨달음이 인류에게 전염되었다. 석가는 최초로 전염된 숙주에 불과하다. 깨달음은 석가를 통해 인간에게로 옮겨왔다. 깨달음에 의해 지식에 차별이 생겼다. 군대에 편제가 있듯이 지식에도 편제가 생겼다. 고수와 하수가 분별되었다. 회사에 노동자와 사용자가 분별되듯이 깨달음에도 지식의 분별이 생겨났다.

의사결정 하는 자와 결정된 것을 집행하는 자로 나누어졌다. 프로와 아마의 차별처럼 그것은 커다란 간극이다. 아마들은 닥쳐! 프로만 자격이 있다. 프로에게만 발언권이 주어진다. 바둑초짜는 복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못 믿는다. 기보를 적지도 않았는데 그대로 복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말이 돼?

그러나 아마 고수들도 복기는 쉽게 한다. 영화 ‘신의 한 수’에서 안성기는 장님을 위한 특수 바둑판을 사용했다. 그거 하수가 쓰는 거다. 대단한 고수가 아니라 중수만 되어도 맹기를 둘 수 있다. 영화의 설정이 잘못된 거다. 바둑알은 많이 놓여도 의사결정은 몇 차례가 있을 뿐이고 나머지는 정석대로 둔다.

훌륭한 피아니스트는 딱 세 번 연주해보고 30분짜리 곡을 왼다. 그게 가능하냐고? TV쇼에서 암산하는 것처럼 가능하다. 엄청나게 큰 숫자의 곱셈과 나눗셈을 그냥 한 번 쑥 훑어보고 셈한다. 보통사람은 믿으려 하지 않는다. 물론 유리 겔러는 엄청난 손가락 힘으로 숟가락을 휘어버린다. 그것도 못 믿는다.

스푼이 휘어진다고? 동전도 휘는 사람이 많다. 지식인과 비지식인의 간극은 크다. 언어가 다르다. 사유체계가 다르다. 그 간극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것에 딴지를 걸고 의문을 던지며 다수의 공감을 얻으려 한다면 문제다. 다수가 틀린다. 보통사람의 보통판단은 보통 틀린다. 지식인은 툴을 쓰기 때문이다.

바둑 고수는 정석이라는 툴을 쓴다. 피아니스트는 음의 밸런스를 쓴다. 고가 있으면 저가 따르고 장이 있으면 단이 따른다. 프레이즈들 사이에서 고저장단이 춤을 춘다. 작곡가의 작곡의도를 알아채기만 하면 곡을 욀 수 있다. 반면 작곡가의 의도를 모르면 절대 곡을 욀 수 없다. 역시 툴을 써서 곡을 암기한다.

암산도 마찬가지다. 특별한 방법을 쓴다.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특별한 방법을 쓴다. 방법은 언어의 완전성 안에 있다. 언어가 담론≫명제≫주어≫명사≫동사로 가는 길이 있음을 깨달으면 환히 보인다. 언어는 지하철 갈아타기와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다. 이 선으로 가다가 저 선으로 갈아타는게 핵심이다.

한국영화는 병사들이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을 묘사한다. 관객들은 공감한다. 과연 죽음이 무서울까? 신병들은 군인들이 모두 죽음을 겁낼거라고 착각한다. 그런 생각이 다수의 공감을 얻어 영화가 흥행하지만 과연 그럴까? 천만에. 그건 첫 사흘동안이다. 사흘만 지나면 다들 눈이 뒤집어져서 죽음을 넘는다.

남자는 우월하고 여자는 열등하다고 말하면 조선시대에는 모두가 공감한다. 남자도 공감하고 여자도 인정한다. 여자는 바깥 일을 안해봐서 자신이 없고 남자는 여자들 하는 방식이 자기네와 다르니까 납득하지 못한다. 여성차별이 훨씬 더 공감과 지지를 많이 받는다. 아랍에서는 지금도 그렇다. 대중이 틀렸다.

그게 가짜라는건 선진국이 입증한다. 30년 전만 해도 남고애들 성적이 여고보다 더 좋았다. 이것은 확실한 팩트였다. 성적표로 증거가 딱 나온다. 그때만 해도 여학생은 설거지 전담이라서 공부를 안 했다. 지금은 남고생들이 게임하느라 성적이 곤두박질이고, 여학생 성적이 더 좋다. 이것이 확실한 팩트다.

학교공부는 여성이 우월하다는게 확실한 진리다. 사유에도 전문가의 입지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확실한 차별이다. 보통사람의 보통주장은 보통 개소리다. 공감툰으로 가면 150킬로 속도로 날아오는 공이 무섭다는 사람이 다수다. 프로야구 선수는 못된다. 철학이라도 마찬가지다.

죽음이 무섭다는 사람은 지성인의 자격이 없다. 철학자의 자격이 없다. 그 정도는 중딩 때 떼고와야 한다. 무려 고딩이 되었는데도 죽음이 겁나는 사람은 철학은 포기하는게 맞다. 종교는 죽음의 두려움을 팔고 있다. 보통사람에게는 맞는 이야기다. 보통사람은 당연히 죽음이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여러분도 전투에 투입되어 백전노장이 되면 죽음을 뛰어넘는다. 안 그럴 것 같지? 천만에. 여러분도 잘못 걸려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윈터스 중대에 들어가는 불상사를 맞게 되면 죽음 따위는 우습게 본다. 그게 인간이다. 최고의 지성이 아니면 이 분야는 발언권이 없다. 예수가 최고의 사람이면 어떻게 말했을까?

그게 정답이다. 그건 정해져 있다. 에베레스트 정상의 높이는 정해져 있다. 1등이 아니면 모두 꼴등인 것이 진리의 세계다. 진리에 2등은 없다. 베트콩 500명 때려잡은 베테랑이 아니면 닥쳐! 죽음이 두렵다면 쳐맞아야 한다. 천국타령? 원죄타령? 지옥타령? 죽음이 무서운 하수들의 무대다. 하수들은 꺼져!

얼음처럼 차가운 이성과 불꽃처럼 뜨거운 열정을 가져야 발언권이 있다. 지구의 대표자가 아니면 애초에 발언권 없다. 인류 모두가 인류의 대표자로 살아야 한다는게 선비정신이다. 이순신 장군 찜쪄먹을 호걸들의 무대라야 한다. 용감하지 않은 병사는, 이성적이지 않은 지식인은 무대에서 퇴출되어야 한다.

바둑초보와 고수는 완전히 다른 방법을 씁니다. 같은 방법을 더 발달시킨게 아닙니다. 무작정 열심히 노력한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정석을 모르면 절대 기보가 암기되지 않습니다. 그건 원래 안 되는 거에요. 툴을 써야 합니다. 툴을 쓰지 않는 사람과는 대화가 불통입니다. 함께 복기가 안 된다는 거죠. 고수들은 연장을 씁니다. 철학적 사유에 있어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은 의사결정구조를 씁니다. 일반인과는 굉장히 큰 간극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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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kim

2015-09-14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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