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도는 일이관지다.”

증자가 일이관지를 충서忠恕로 설명한 것은 잘못이다. 충忠과 서恕라면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일이관지는 오직 서恕 하나이며, 서는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는 것이다. 서恕는 용서가 아니다. 군자는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서恕는 대칭원리에 따른 균형감각 곧 밸런스 개념이다. 공자는 밸런스의 원리 하나로 모든 것을 설명했다. 밸런스는 중용의 법칙이다. 중은 가운데가 아니라 저울의 축이다. 중은 두 번째로 오는 것, 중복되는 것, 겹치는 것이다. 바퀴축과 같다. 바퀴살과 바퀴살이 겹친다. 마디와 같다. 자리와 자리가 겹친다. 겹치는 부분이 대칭의 축이다. 축을 깨달으면 중용을 깨달을 것이며 중용을 깨달으면 서恕를 깨닫는다.

공자의 일관된 가르침은 한 마디로 소인배의 심리불안에 따른 종교행동을 막자는 것이다. 일의 ‘복제, 조합, 연출’에서 복제는 철학가의 역할, 조합은 정치가의 소임, 연출은 예술가의 몫이다. 대중은 예술가의 세련된 교양과 문화와 예술을 배워 각자 자기 스타일의 개인주의를 완성하면 된다. 공자의 시대에 그것은 예법이었다. 소인배가 철학가와 정치가를 겸하려고 하면 재앙이 닥친다. 철학가를 겸하기 위해서는 먼저 철학의 필요성을 제기해야 한다. 집단을 공포에 빠뜨리는 마녀사냥을 저지른다. 정치가를 겸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겁주는 위세행동을 해야한다. 약자의 비굴함과 강자의 교만함으로 나타난다. 역시 위태롭다.

이 모든 것을 ‘일의 흐름’ 하나로 풀어낼 수 있으며, 그 중핵은 의사결정이고 의사결정이 가능한 구조로 만드는 것은 밸런스다. 그것이 서恕다. 서는 용서가 아니라 너와 나의 상호작용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상대방이 잘못된 행동을 해도 그것이 상대방 자신의 이익에 맞는 합리적 행동이면 받아들인다. 장성한 자식이 독립하는 것은 배신이 아니다. 군자는 자신이 살기 위한 합리적 배신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배신자 조조가 사마의에게 당하듯이 먼저 배신했다가 자신도 배신당하는 비합리적인 행동은 단호하게 응징한다. 공자는 용서하지 않고 준엄하게 꾸짖어 소인배를 타격했다.

용서하라는 말은 사건 전체를 봐야 하므로 곧 나서지 말고 조금 더 지켜보라는 말입니다. 사건은 부분이 아닌 전체에서 일어납니다. 하부구조가 아닌 상부구조에서 일어닙니다. 그러므로 성급하게 개입하면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치더라도 드러난 표피보다 감추어진 배후를 쳐야 합니다. 성급한 ‘자로’에게는 부형이 있으므로 곧바로 나서지 말라고 말했고, 신중한 염유에게는 불의를 보면 곧 나서라고 말했습니다. 용서는 없습니다. 그러나 말단은 건드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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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kim

2016-01-28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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