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의 신神은 무엇인가?
- 다른 게시판에 있었던 일과 관련한 내용입니다. -
진지한 이야기는 진지하게 질문해야 합니다. 남이 평생 생각한 것을 30단어 정도로 해먹겠다면 날로 먹자는 수작이 아니겠습니까? 구조론에 관한 질문은 깨달음의 대화에 댓글을 달거나, 구조론 게시판을 이용해주기 바랍니다. 자유게시판은 가벼운 이야기를 하는 공간입니다.
신神에 대한 언급이라면, 먼저 자신의 생각부터 밝히고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구조론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라면 제자가 스승에게 묻는 자세라야 합니다. 그냥 지나가다가 길 물어보는 식이라면 제가 대답할 이유가 없습니다. 숨은 전제가 있거나 가시가 있는 질문은 사절입니다.
특정한 방향으로 답을 유도하거나, 함정을 파거나, 넘겨짚는 질문이라면 500방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곳은 자유로운 공간이지만 자유롭게 추태를 부리면 저 또한 자유롭게 무시합니다. 이곳은 다른 곳 어디에도 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경쟁하는 공간이 아니란 말입니다.
호객하는 식당이 아니고, 손님 골라받는 식당입니다. 이런 사이트가 여러 곳 있다면 저 또한 독자 눈치를 보겠지만, 하나 밖에 없으므로 500방을 아끼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질문은 좋으나, 불심검문하는 태도는 곤란합니다. 구조론은 원래 사과라거나 용서라는게 없습니다.
사과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그냥 수학문제 푸는 거니까요. 제 입장에서는 말귀 알아듣는 한 명의 제자를 얻는데 필요한 확률이 요구될 뿐, 팔장끼고 지켜보는 수만 관객은 백안시입니다.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정도면 대충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걸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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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amu.wiki/w/이신론 (나무위키)
구조론의 입장은 무신론은 아니고, 굳이 말한다면 이신론이라 할 수 있다. 이신론에 대해서는 나무위키가 좋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공자나 노자도 이신론자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도 이신론자라고 한다. 단 구조론은 일원론이므로 일신론이다. 범신론과는 다르다.
구조론은 물질을 인정하지 않는다. 물질은 존재의 근본이 아니다. 그것은 2차적인 표상이다. 제 1 원인이 아니다. 물질은 작용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이다. 작용하는 주체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제 1 원인으로는 볼 수 없다. 무신론자들은 물질을 제 1원인으로 본다.
그러므로 무신론자에게는 ‘무신론자의 신’이 있다. 무신론은 무신론자의 신을 물질로 대체시켰을 뿐, 물질 이전의 제 1 원인에 대해서는 전혀 논하지 않는다. 즉 물질을 제 1 원인으로 보므로 애초에 대화가 안 된다. 그러므로 무신론자와는 신에 대해서 논할 수 없다.
동양적 사유와 서양적 사유는 출발점이 다르다. 동양은 ‘사건’으로 본다. 서양에는 그러한 관점이 없다. 의사결정으로 보는 관점 자체가 없으므로 애초에 대화 자체가 불성립이다. 물질 이전에 무엇이 있는가? 모른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표상이 있으면 추상이 있다. 물질이 표상이므로 추상인 신이 있는 것이다. 모르므로 더 깊이 들어가는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다. 어쨌든 그것은 있다. 단 그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인격신은 아니다. 수염난 할아버지가 아니다. 기독교의 근본은 아케나톤의 일신교다.
아케나톤이 일신교를 만들었을 때는 이신론자의 관점으로 접근했고, 초기 기독교 역시 이신론자의 관점으로 접근했다. 유태인의 신은 원래 인신공양의 희생제사를 받는 조상신이다. 중국과 비슷하다. 중국이나 마야도 생사람을 잡아바치는 유태인과 같은게 있었다.
중국과 유태는 공통적으로 사람에서 양으로 희생제물을 바꾸었다. 부족에서 국가로 규모가 커지자, 부족의 결집을 기대하는 조상신 개념에서 이신론적 신개념으로 바뀐 것이다. 전혀 다른 두 갈래의 개념이 나중에 합쳐져서 서양의 God와 중국의 천天을 만든 것이다.
구조론은 의사결정원리를 중심으로 사유한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하나로 있다고 본다. 떨어져 있는 것은 2차 표상인 물질이다. 우주 모두가 연결된 전체의 단위에서 대립각을 세우고, 구조론의 대칭을 성립시켜서 의사결정해야 한다. 그것이 신과의 일대일 개념이다.
세상 모든 것이 연결되어 온전한 하나를 이루었다면 그 바깥에 무엇이 있는가? 아무 것도 없다. 결국 최종적으로는 신이 신 자신과 대칭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복제다. 아들은 아버지의 복제다. 아버지가 죽어야 아들이 산다. 신이 죽어야 신이 산다. 그것이 일대일이다.
중요한 문제는 개인이 의사결정단위가 아니다. 당신이 어떻게 느꼈든, 어떻게 생각했든 그것은 근거가 될 수 없다. 물론 아침밥을 뭐 먹을건지와 같은 사소한 문제는 기분대로 해도 된다. 중요한 문제는 개인을 배제해야 한다. 나도, 가족도, 국가도, 인류도 넘어서야 한다.
신과 그 신의 죽음과 그 신의 새로 태어남만이 유일하게 근거가 될 수 있다. 우주는 신 자신의 펼침이기 때문이다. 빅뱅 이전에 우주는 한 점이었다. 물질을 넘어서도 역시 그러하다. 거기서 있을 수 있는건 자기부정과 그 부정을 통한 긍정 밖에 없다. 다른 근거가 없다.
기독교의 신 개념은 현실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아이디어에 불과하다. 원래는 이신론으로 출발했다고 봐야 한다. 무신론은 물질을 숭배하는 물질교로 봐야 한다. 물질을 모든 논리의 제 1 근거로 본다. 그런데 물질은 ‘일’이 없다. 물질이 하는 일이라는게 아예 없는 것이다.
‘미션’이 없다는 말이다. 의사결정은 일을 근거로 한다. ‘일’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 일의 다음 단계를 결정하는 것이다. 일이 시작되지 않았다면 일의 다음 단계가 없다. 다음 단계가 없다면 그 어떤 주장이든 근거가 없다. 그냥 하다보니 결과가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 세상은 물질이 아니라 일로 되어 있다.
◎ 일은 이미 시작되었고 그것이 의사결정의 근거다.
구조론은 존재를 물질이 아닌 일로 본다. 일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다음 단계가 있다. 그러므로 의사결정의 근거가 있다. 근거는 제 1 원인이다. 그것은 물질이 아니다. 유물론이 아니다. ‘유일론’이다. 그 일은 1이 아니라 work다. 일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본다.
신에게 뭔가를 부탁하는 기도를 할 필요는 없지만 자기 의사결정의 근거를 찾는 기도는 할 수 있다. 신과의 대화는 가능하다. 그렇게 했을 때 더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하고, 예측이 더 잘 맞아떨어진다. 뭔 말인가 하면 나를 기준으로 예측하면 빗나간다는 말이다.
나를 비우고 그 자리에 신을 넣고 예측하면 정확도가 올라간다. 어쨌든 당신은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그 결정의 주체는 ‘나’다. 그래서 실패한다. 당신의 예측은 새누리당의 총선결과 예측처럼 오지게 빗나간다. 그 자리에 신을 넣으면 적중한다. 나는 그 방법을 쓴다.
세상을 물질이 아닌 일로 보면 일은 항상 이전 단계와 다음 단계가 있다. 구조론의 신은 그 이전단계를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에서 긍정하는 것이다. 즉 나의 존재는 다음 단계와 연결하는 하나의 링크라는 말이다. 어떻든 갈림길 앞에서 당신은 의사결정해야만 한다.

신이 있느냐 없느냐는 의사결정의 근거가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나는 근거가 있다고 보고, 그 근거는 표상되는 물질존재 이전의 추상단계에 있다고 보고, 물질 이전단계를 ‘일’로 봅니다. 일이 있다고 봅니다. 그 일의 자세한 내막은 모릅니다. 게임 속의 아바타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그 게임은 있습니다. 아바타가 자신을 기준으로 의사결정하면 예측이 빗나가지만, 게이머가 있다고 치고 의사결정하면 적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