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성의 이해
기본적으로 한국어가 되어야 한다. 문장이 호응이 안 되는 데도 의사소통이 되고 있다면 치명적이다. ‘몸에 좋다.’ - 이런 소리 하는데 태연하게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과는 대화할 수 없다. 그런건 말이 아니고 헛소리다. 헛소리로 의사소통하지 말자.
헛소리로도 낮은 수준에서 의사소통이 가능하지만 그게 굳어져서 망하는 거다. 언어의 층위가 있다. ‘숨은 전제’가 방해하므로 사유가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지 못한다. 완전한 문장으로 말하고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완전한 문장은 말하자면 ‘工’ 꼴이다.
A의 변화가 B의 변화를 낳는다. A와 B 사이를 통일하는 C가 있으니 사건의 계를 이룬다. 언어가 이 구조라면 완전하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졌다. 까마귀는 A, 날자는 A의 변화, 배는 B, 떨어졌다는 B의 변화다. ‘까마귀 날자’와 ‘배 떨어졌다’는 통일하는 C는?
이게 없으면 가짜다. 방정식과 비슷하다. X축과 Y축의 선이 길게 연장되었다. 두 선은 A와 B, 두 선의 연장은 A와 B의 변화다. 둘이 축으로 엮여 있다. 축이 주어이고 X가 목적어이면 Y가 동사다. 언어 안에 이 구조가 있어야 한다. 방정식도 되고 좌표도 된다.
모든 공식이 그러하다. 좌표에서 X와 Y는 비례가 보통이지만 반비례도 있고 다양한 형태가 있다. 주어는 변하지 않지만 때로는 주어가 변한다. 계는 변하지 않으나 새로 생성된다. 계를 세팅한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다. 배가 고픈게 A라면 밥을 먹는 것은 B다.
이 둘을 통일하는 C는 소화체계다. 그 소화체계라는 단어는 보통 없다. 필자가 방금 지어낸 말이다. ‘섭생’이든 ‘식이’든 ‘먹이활동’이든 적당한 개념을 찾아 본인이 명명해야 한다. 배가 고프다, 밥을 먹는다는 말은 일상적으로 쓰이지만 그 둘을 통일하는 말은 없다.
깨달음이란 이렇듯 A와 B를 통일하는 C를 찾아내거나 명명하는 것이다. 보통은 그 C의 이름이 없으므로 우리는 그 C의 존재를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창의하지 못한다. 복제하지 못한다. 남자가 A고 여자가 B라면 결혼은 C다. C는 부부 거나 혹은 가정이다.
그런데 부족민은 부부나 가정이라는 단어가 없다. 그런 개념이 없다. 국가라거나 문명이라거나 이런 단어는 부족민에게 없는 것이다. C를 나타내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오늘날 인간이 이 모양 이꼴이다. 더구나 인간의 언어가 이런 구조를 가진다는 사실을 모른다.
필자는 개소리인지 아닌지 3초 안에 판단한다. 내용은 보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설명하려면 피곤하다. 언어의 구조만 보면 그 사람 말이 맞는지 틀렸는지 알 수 있다. 언어의 층위만 보고 판단한다. 주어를 건드리는지 목적어를 건드리는지만 본다. 주어는 절대주의다.
합리주의, 진보주의는 주어를 건드리고 상대주의, 실용주의, 보수주의는 목적어를 건드린다. 다문화를 거론한다면 주어는 한국인, 목적어는 외국인이다. 외국인이 변해야 한다고 말하면 보수꼴통이다. 더 들어볼 필요가 없다. 3초 안에 ‘너 아웃. 꺼져.’ 이렇게 된다.
구조의 갖춤이 아니면 일단 개소리다. 언어 안에 완전성이 있다. C는 보통 장場의 형태로 되어 있다. 기압이라든가 수압이라든가 자기장이라든가 분위기라든가 이런 거다. 남녀 사이에 중요한 것은 무드다. 무드는 바깥에 있다. A와 B를 통일하는 C는 바깥에 있다.
과자의 맛을 결정하는 것은 과자를 입으로 깨물었을 때 과자가 부서지면서 내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다. 제과회사들이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부분이라고 한다. 데이트를 한다면 조명이나 향기가 중요하다. 조명이 너무 밝으면 화장이 떡져보이므로 여자가 짜증을 낸다.
남자는 여자가 짜증난 원인이 여자 내부에 있다고 착각하므로 답을 찾지 못한다. 무드라는 단어가 없거나 혹은 있어도 뉘앙스가 전달되지 않으면 C를 표현할 수 없다. 조영남을 옹호하는 진중권의 견해를 3초 이상 읽을 이유가 없다. 내용을 볼 필요는 당연히 없다.
그의 언어에 C가 있는지만 본다. 조영남이 목적어 A라면 송기창의 대작은 동사 B다. 둘을 통일하는 C는? 그것은 미술계 전체의 입장이다. C는 나무처럼 자란다. C와 C의 전개방향을 알아야 어른들의 대화에 낄 수 있다. 이발소 그림이 왜 문제인지 알게 된다.
이발소그림은 적이다. 미술계의 적이다. 이발소 그림이 잘 팔리면 화가들은 굶어죽는다. 미국 소비자들이 이발소그림이나 사들이므로 미국 여대생은 추리링이나 입고 잔디밭을 뒹굴고 있는 거고 그만큼 미국 문화산업의 경쟁력은 떨어진다. 우리의 관심은 B에 있다.
목적이 달성되었는지만 보는 것이다. 그러나 진짜는 C다. 주체가 확장되었는지가 중요하다. 학생이 공부를 한다면 성적이 중요하다. 왜 공부를 하지? 이건 목적어의 변화다. 공부 대신 운동을 할 수도 있다. 왜 학생이지? 이건 주어의 변화다. 숨은 전제를 캐야 한다.
학생이 공부하는 것은 학생 신분에서 벗어나려는 거다. 그게 중요하다. 인류의 에너지난이 해결되면 학생이 공부를 안해도 된다. 취직걱정 안 해도 된다. 마찬가지로 송기창의 대작이나 조영남의 협잡보다 미술계의 변화, 대한민국의 변화, 인류의 변화가 더 중요하다.
C를 몰라도 대화가 되는게 더 문제다. 닭고기 먹으면 피부가 닭살이 된다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이 있다. 유추해석이다. 코가 큰 남자는 고추도 크다고 믿거나 그런거 있다. 그냥 비슷한걸 가져다 붙인다. 무당이 인형에 바늘을 꽂아 저주를 부리는게 유추의 논리다.
언어가 이 수준에서 놀게 된다. 틀린 언어로도 대화가 가능하나 그래서 망한다. 오목에 재미들리면 바둑을 못 배운다. 동사의 변화는 개도 알아챈다. 목적어의 변화는 사람이 알아챈다. 주어의 변화는 깨달은 사람이 안다. 조금 아는 정도로 곤란하고 잘 알아야 한다.
이것만 백번 훈련하면 뭐가 될 것도 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