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의 관점을 도입하라**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인류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원숭이와 인간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문명중독에 빠져 있으니 그 점을 모르고 오판한다. 대중이 허경영에게 환호하고 트럼프를 지지하는 멍청한 선택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아는게 없는 대중이 트럼프에 속아서 오판한다고 여기고 계몽을 구사하여 사실을 알려주려 한다면 무지한 경우다. 배후에 숨은 대중의 전략을 꿰뚫어보아야 한다. 인류학의 관점에서 보면 대중의 트럼프 지지는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다. 모르고 딴짓하는 사람은 대중이 아니라 바로 지식인이다.
부족민이 1 1=2까지 전진하기가 매우 어렵다. 문명중독에 걸린 우리에게는 쉬운 문제로 착각되지만 부족민에게는 절대로 해결이 안 되는 문제다. 여러번 말한 바 있는 돌도끼의 비유와 같다. 부족민을 돌도끼에서 쇠도끼로 갈아타게 하는 것은 단순한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계몽으로 안 된다.
그들의 삶과 철학을 송두리째 바꾸는 문제이므로 쉽게 해결될 듯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돌도끼로 세 사람이 다섯시간 정도 걸려서 작은 나무 하나를 자르는 부족민에게 쇠도끼를 쥐어주면 5분만에 도끼질을 학습한다. 백인 탐험가 일행은 쇠도끼에 익숙해진 부족민을 보고 만족하여 떠난다.
3개월 후 탐험을 마치고 다시 마을로 돌아와서 쇠도끼로 인해 부족민의 삶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을 것을 확인하려 한다. 그러나 부족민은 다시 돌도끼로 돌아가 있다. 여기에는 복잡한 권력 메커니즘이 잠복해 있다. 주술사의 저주가 작동하면 부족민은 악령이 붙어있는 쇠도끼를 숲에 던져버린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건드릴 때는 신중해야 한다. 작은 쇠도끼 하나가 부족민 공동체를 파멸시킬 수도 있다. 반대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부족민은 절대 쇠도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트럼프들은 이러한 인간의 원초적 약점을 파고 든다. 이면에서 작동하는 의사결정 메커니즘을 교체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지극히 쉬운 문제가 부족민에게는 매우 어려운 문제라는 것은, 반대로 우리와 같은 문명인들도 경험한 적이 없는 낯선 과제를 두고 어떤 정치적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부족민처럼 멍청해져서 안철수를 찍고 트럼프를 지지하고 브렉시트를 의결하는 바보짓을 하고만다는 것이다.
브렉시트에 찬성한 영국인들은 멍청하기가 돌도끼를 고집하는 부족민과 같다. 계몽으로 해결되지 않으니 의사결정 메커니즘을 건드려야 한다. 종교를 바꾸는 문제다. 트럼프 주술사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비극적 재앙이 일어난다. 현대사회라도 도처에 음모론을 구사하는 주술사가 암약한다.
개혁이 쉬워보여도 종교를 바꾸는 일 만큼 어렵다. 아랍에서 무슬림을 기독교도로 만들 수 없고 인도에서 카스트를 없앨 수 없다. 100년이 걸려도 안 된다. 인류는 익숙한 것을 잘할 뿐 낯선 과제 앞에서는 바보가 된다. 아인슈타인 뺨치는 천재라도 첫 데이트 때는 쩔쩔 매는 그런거 있다.
이창호 국수가 바둑을 다 이기지만 논산훈련소에 입소하면 전투화 끈을 잘 못 매는 그런거 있다. 인류학으로 해결해야 한다. 인류학이 없는 역사학은 심리학이 없는 철학과 마찬가지로 앙꼬없는 찐빵이 된다. 인류학의 근본은 다윈의 자연선택, 생존경쟁, 인종주의 개념을 극복하는 데 있다.
다윈의 자연선택이 인종주의로 해석되어 현대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 인종주의가 알차게 끼어들어 있다. 모든 학문분야에서 숨은 인종주의를 걷어내는게 21세기에 주어진 철학인의 임무다. 다윈의 경쟁논리는 부족민에게 쇠도끼를 줘서 마을에 재앙을 일으키는 짓과 같은 무모한 짓이다.
인간의 우열은 논할 이유가 없는 것이며 문명은 다양한 환경에 다양한 형태로 적응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보다 복잡한 환경이 더 유리한 것은 사실이다. 이 지점을 처음 포착한 것은 인류학자들이 중심이 된 서구 구조주의 철학이다. 구조론과 유사하나 다르니 그들은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20세기 후반에 유행한 구조주의 인류학은 그러나 문화의 다양성을 강조할 뿐 인류 전체가 하나의 닫힌계라는 점은 알아채지 못했다. 다양한 환경에 따른 다양한 문화가 있으나 문제는 그 환경이 발전한다는 데 있다.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가 구조주의 관점을 흔들었음에 유의해야 한다.
◎ 서구 구조주의 – 다양한 문화권에 다양한 각자 자기 논리가 있다.
◎ 구조론의 관점 – 환경은 채집, 농업, 유목, 도시, 상업으로 발전한다.
부족민문화에 대한 낭만적 접근은 어리석다. 1만여년 전 인류가 신대륙으로 진출하면서 엄청나게 나쁜 짓을 저질렀다. 1만년 전에 이미 인류가 가는 곳마다 대규모 멸종사태가 일어났다. 다양한 문화권에 각자 자기 논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논리가 계단식으로 발전한다.
문화 상대주의도 일정한 가치가 있다. 예컨대 조선왕조의 유교사회도 일정한 성취를 이루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봉건한계 안에서 선비중심의 보다 민주적인 의사결정 모델을 만들었고 우리는 지금 그 혜택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도 나름 가치있는 주체모델을 만들었는가? 천만에.
송두율의 내재적인 접근은 위험한 발상이니 프랑스나 독일의 주류철학에 아부하는 노예사상이다.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통일신라는 도시모델이었다가 실패하고 조선왕조의 농업모델로 퇴행했다. 그러나 국가단위로 보면 흥망이 있지만 인류전체로 보면 문명은 줄기차게 전진해왔다.
인류 전체로는 하나의 모형이 있을 뿐이다. 무역을 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도록 되어 있는게 고대 도시국가 모델의 한계다. 로마 역시 무역로가 차단되자 멸망해 버렸다. 신라의 멸망과 로마의 멸망은 원리가 같다. 나라는 멸망해도 문명권 전체는 확산되어 규모가 커진다. 저변이 넓어진다.
그리고 재도전한다. 역사는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면서 전체적으로는 전진한다. 인류의 의사결정 모형은 채집에서 농업≫유목≫도시≫상업으로 전진하지만 그에 맞는 의사결정구조를 못 만들면 조금 되는 듯 하다가 한계에 부닥쳐 채집으로 퇴행한다. 그리고 맞는 구조가 나오면 다시 전진한다.
로마가 도시를 거쳐 상업까지 전진했다가 퇴행했듯이 징기스칸은 유목민의 단계 안에서 극한까지 밀어보다가 안 되니까 고원으로 후퇴해버린 것이다. 징기스칸은 도시를 통제하는 의사결정구조를 만들지 못했으므로 붕괴는 필연이다. 일본은 에도시대에 나름 도시문화를 발달시켰다.
그러나 막부가 상업을 통제하는 쇄국에 의해 유지된 불안정한 구조였다. 개항을 하자 곧 막부는 멸망해 버렸다. 구조의 한계다. 19세기 유럽의 절대주의 왕실은 중상주의로 나아갔으나 적절한 의사결정구조를 만들지 못해 붕괴했다. 그리고 권력은 장사할줄 아는 부르주아 집단에 넘어갔다.
러시아의 피오트르 대제 역시 봉건구조 안에서 상공업을 일으켜보려 했으나 그에 맞는 의사결정구조를 만들지 못해 붕괴해 버렸다. 청나라의 양무운동이나 고종황제의 개혁시도가 근본적인 한계에 부닥친 것과 같다. 의사결정구조를 바꾸지 않는 상태로는 전진이 절대 불가능한 것이다.
북한은 나름 국가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나 상업을 못한다. 그 구조로는 원래 안 되는 거다. 역사의 본질은 주어진 환경에 맞는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해왔는가이다. 그러면서 부단히 그 환경을 변화시켜 왔는가다. 중국의 농경민 모델에 비해 한반도의 유목민 모델이 더 발전된 의사결정 형태다.
여기서 다시 도시인의 모델 그리고 상업인의 모델을 더해야 한다. 그러려면 껍질을 벗어야 한다. 종교라는 동원위주 낡은 껍질을 벗어던져야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다. 종교의 본질이 대규모 동원이라는 점에서 농경민 모델과 가깝다. 유태인은 상업인의 의사결정 모델을 만들어 발전시켰다.
그러나 도시민 모델의 단계를 건너뛰었으므로 구조붕괴에 직면했다. 이웃나라와 공존하지 못하는 것이 그러하다. 유태인끼리 단결이 안 되므로 그들은 불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문제를 배제한다. 많은 부분을 포기하는 방법으로 불안정하게 국가형태를 유지하니 의사결정구조의 실패다.
인류학을 배운다는 것은 인류가 멍청하다는 사실을 배우는 것이다. 인류의 분별력은 벼룩보다 조금도 나은게 없다. 벼룩도 위기를 당하면 아이큐가 올라간다는 말이 있는데 반대로 인간은 위기를 당하면 바보가 된다. 브렉시트에서 보듯이 1 1=2 정도의 판단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의사결정을 집단에 떠넘기고 도망치는게 가장 현명한 의사결정이 되기 때문이다. 벼룩은 당당하게 결정하는데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떠넘기기가 오히려 인류를 발전시켜 왔으니 그 과정에 상호작용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스마트 시대에 인류가 70억 단위로 바보짓을 해야한다.
70억 단위의 상호작용을 일으켜 무지에서 벗어나게 된다. 2차대전의 교훈이 그러하다. 인간이 바보라는 사실을 알아챈게 양차 세계대전의 소득이다. 그런데 인류는 50년도 되지 않아서 곧 망각했다. 지금 인간은 무려 자신이 사람인줄 안다. 그런데 인간 안에 과연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가?
옳은 길과 나쁜 길이 있으면 벼룩은 옳은 길을 선택하지만 인간은 나쁜 길을 선택한다. 벼룩은 관심이 있는 대상에 잘보이려 들지만 인간은 반대로 관심이 있으면 그 사람을 괴롭힌다. 인간은 벼룩보다 못한 존재다. 그런데도 사회가 돌아가는 것은 의사결정을 타인에게 떠넘겼기 때문이다.
결국 조금이라도 똑똑한 사람이 최종결정을 하게 되고 그래서 사회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이러한 본질을 알고 의사결정을 잘 떠넘기는 구조를 세팅해야 하며 채집, 농업, 유목, 도시, 상업의 다섯가지 의사결정모델은 그러한 의사결정 떠넘기기 방법이다. 채집모델은 문제가 생기면 배척한다.
상대방에게 떠넘기고 상대의 반응을 보는 수법이다. 의사결정 회피다. 무조건 남탓하고 반대만 일삼는다. 농업은 인원동원을 늘리는 방법이다. 숫자를 모아놓으면 해결책이 나와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역사기록으로 보면 100만대군을 조직했다가 대패하여 몰살되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았다.
숫자는 의사결정의 방해자가 된다. 상호작용의 긴밀도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유목은 고도의 역할분담을 통해 각자 자기가 맡은 지역을 책임지는 방법을 쓴다. 일정한 성취가 있으나 최종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이 경우 중간관리자가 강해지고 대신 리더가 무능해지기 때문이다.
심하면 리더가 파업하는 박근혜짓을 하게 된다. 우병우 감싸기가 일종의 대통령 파업이다. 도시민은 공론을 일으켜 소수파가 대항할 수 있도록 한다. 이 방법으로 잠복해 있는 불안요소를 들추어 대비한다. 조선왕조의 당쟁도 이러한 측면이 있다. 내부대결을 통해 강해지는 방법이다.
상업은 흥정을 통해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갖추고 상대방이 가진 경우의 수를 모두 사전에 체크한다. 이 다섯가지 모두가 갖추어진 의사결정구조를 만드는 자가 다 먹는다. 예컨대 정당에도 이 다섯가지가 다 있어야 집권이 가능해진다. 여기서 우선순위를 잘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지도자는 상업인의 관점으로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장사할 생각을 해야 한다. 어느 한쪽에 붙는 즉 망하는 것이다. 정당도 그러한 관점으로 조직하여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아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치가들이 독선에 빠져 내가 옳고 네가 틀렸다는 식의 폭력적 태도를 보인다.
세상이 기본적으로 주고받기 거래에 의해 작동한다는 타자성의 원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세상은 우리편이 아니다. 사방이 모두 적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상업인의 눈을 얻을 수 있다. 우리편이라고 믿는 순간 배신이 시작된다. 노무현은 김근태와 추미애와 정동영의 배신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썼다. 박근혜는 배신자를 쓰지 않는다. 노무현은 상업인의 눈을 가졌고 박근혜는 그것이 없다. 적도 써야 한다. 그게 장사꾼의 마인드다. 상업인의 마인드가 없으므로 턱도 없이 아군이라고 믿고 방심하다가 탈탈 털린 다음에 배신을 당했다며 길길이 날뛰면 공황장애에 걸린다.
박근혜의 지금 상태가 그러하다. 당연히 때가 되면 배신한다고 믿고 이에 대비하여 자기 세력을 길러 균형을 맞추는게 노무현의 방법이다. 김근태, 정동영, 추미애를 유시민, 안희정, 이광재로 막는 것이다. 장사꾼은 배신자와도 거래한다. 이러한 인간존재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인간은 처음 가는 길에서는 무조건 잘못된 판단을 하는데 그게 더 유리하다. 두 갈래 길 중에서 옳은 길을 가는 사람은 망하고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은 흥한다. 잘못가서 이 길이 아닌게벼 하고 돌아나올 때 넓은 시야를 얻기 때문이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 무조건 두 길을 다 가봐야 한다.
돌아온 탕자처럼 더 넓은 시야를 획득하고 사건의 전모를 보는 것이다. 옳은 길만 가는 범생이들은 한 번도 방향전환을 해본 적이 없어서 의사결정능력을 잃는다. 우병우가 타이밍 못 잡고 우물쭈물 하는 것과 같다. 노무현 바보가 이기고 똑똑한 이회창이 지는 것이 인간사회의 작동원리다.
그러나 바보짓은 새누리당에게 시키고 우리는 올바른 길로 가야 한다.
정치를 하면 다들 원시인이 됩니다. 인간이 똑똑한 것은 같은 길을 두 번 가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무조건 오판합니다. 실수로 바른 판단을 하면 갑자기 변덕을 부려 되돌아옵니다. 결국 오판합니다. 두 번째부터는 바른 판단을 하는데 경험 덕분입니다. 노무현처럼 밑바닥 경험을 해야 현명해지는 것입니다. 고수는 왼쪽이 옳다는 사실을 알아도 일부러 오른쪽을 슬쩍 건드려보고 왼쪽으로 갑니다. 왼쪽이 옳다고 곧장 가면 내부반란에 의해 구조붕괴가 일어납니다. 오른쪽을 건드려서 반동의 힘을 빼놓고 가야 제대로 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