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은 너무 단순한 이야기라서 이러쿵 저러쿵 논하고 자시고 할 건덕지가 없다. 초등학생 정도의 관심사만 있으면 된다. 1 1=2가 되는 사람은 이미 구조론을 알고 있다고 봐야 한다. 단 이걸 연역의 관점에서 명석하게 이해하는게 구조론이다. 보통은 문제해결의 관점에서 본다. 즉 문제가 처음부터 주어져 있는 거다. 그렇다면 이미 반은 해결되어 있다.
호응하면 된다. 문제가 호呼하고 부르면 응應하고 대답하면 된다. 그러나 예술가의 창조작업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내야 한다. 바흐가 새로운 작곡기법을 시도한다면 그러하다. 후배들을 힘들게 할 작정으로 공연히 문제를 만들어내는 셈이다. 아무나 할 수 있었던 음악을 베토벤이나 모차르트급 고수만 덤비도록 문턱을 높였다.
무슨 말인고 하면 초등학교 1학년 수학수업 때 1 1이 왜 2인지 설명해주는 교사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냥 그렇다 하고 우기면서 눈에 힘 주고 째려본다. 닥쳐! 그런 거야. 알겠어? 죽을래! 이러면 움찔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별 수가 있냐고. 인과율은 다들 배워서 알 것이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 그런데 왜지? ‘왜죠?’ - 하고 시비하면 쳐맞는 거다.
걍 그런거야. 죽을래? 인과율이 뭔지 말해주는 사람이 없더라. 인과법칙은 사건 안에서 성립한다. 그렇다면 인과율을 설명하기 전에 사건부터 설명해야 한다. 사건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냥 갑자기 인과율을 들이댄다. 그리고 인상을 팍 쓴다. 이래도 되나?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는게 아니고 다양한 원인이 있는 거다. 원인들의 종류에는 어떤 것들이 있지?
이걸 가르쳐주는 교사가 없었다. 그렇다. 인간들은 완전 돌대가리다. 인류문명은 이토록 허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 거다. 수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과율로 도배된다. 수학은 잘들 하는데 논리가 없다. 걍 처음부터 숫자를 가르쳐준다. 그래도 되나? 뭔가 핵심을 건너 뛰고 있다는 느낌 안 드는가? 수가 뭔지를 말해줘야 한다. 모든 것의 어머니는 상호작용이다.
숫자도 여기서 나오는 거다. 상호작용이니 매개변수니 뭐 이런 거창한 개념은 필자가 있어보이려고 그럴듯한 단어를 가져와서 쓰는 것이다. 머리에 힘 주지 말자. 간단하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원인이 양쪽에 있다. 그것이 우주의 근본 원리이며 에너지의 속성이다. 더 쉽게 이해하자. 암수가 수작하여 새끼를 맹글자면 타이밍부터 맞아야 한다.
발정기가 아닌데 수컷이 낑낑대봤자 답 안 나온다. 수컷의 능력이 신통찮아도 허당이 된다. 암수가 동시에 타이밍이 딱 들어맞아야 상호작용이다. 암컷은 가만있는데 수컷이 혼자서 헛물을 켠다면 일방작용이다. 구조론의 질은 상호작용을 말한다. 양쪽이 다 시간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준비된 상태다. 그렇다면 비로소 사건이 일어나준다. 인과법칙 작동이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에서 목도하는 여러 사실들은 일방의 작용이다. 교사가 수업을 하는데 학생의 동의를 거치지 않는다. 걍 시간 되면 종 치고 종 치면 수업한다. 학생이 저 아직 수업할 생각이 없걸랑요? 이러다가는 쳐맞는다. 그러나 처음 입학식 때는 동의했다. 한 번 동의해놓고 그걸 재탕하는 거다. 그렇다. 여러분은 상호작용이 아니라 일방작용을 당한다.
하지만 근본을 캐보면 한 번씩 동의했다. 우주 안의 모든 사건은 상호작용이며 일방작용은 없다. 그러나 구간을 잘라서 보면 입자는 일방작용이다. 입자는 질 안에서 기능하므로 근본 상호작용 안에 일방작용 구간이 있는 것이다. 외곽순환도로에 돈 안 내는 구간이 있어도 누군가는 당신을 대리하여 돈을 지불하고 있다. 어떻게든 당신은 돈을 내고 있는 것이다.
질 안에서 매개변수 하나를 죽이면 입자가 된다. 입자는 두 공간의 일치를 필요로 한다. 질은 시간과 공간을 둘 다 정해야 한다. 초딩이 입학을 해도 시간과 장소를 정한다. 언제 입학하고 어느 학교에 입학할 것인가? 그런데 시간은 정해져 있다. 8살이면 입학한다. 장소는 고른다. 이것이 입자다. 시간과 장소를 둘 다 맞추면 질이고 공간의 장소만 고르면 입자다.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다면 시간과 장소가 다 맞아야 한다. 그러나 낚시로 잡는다면 시간은 낚일때까지 무제한이고 장소만 고른다. 질과 입자의 차이가 그러하다. 매개변수 하나를 죽이는 것이다. 힘은 시간과 장소가 모두 정해져 있다. 가위라면 칼날 두 개가 한 지점에 모인다. 시간과 장소가 모두 고정되어 있다. 비유하면 바다에 그물을 고정시켜둔 정치망과 같다.
칼은 여기서 다시 시간을 죽인다. 시간을 고정시키는게 아니라 배제한다. 운동이다. 더 단순한 상황은 공간도 배제한다. 량이다. 사과를 손에 들고 있다. 놓아버리자. 언제? 상관없음. 어디로? 상관없음. 중력이 작동하고 있으므로 사과를 언제놓든 어디로 놓든 상관없이 사과는 땅에 떨어진다. 스위치를 끈다고 치자. 언제 끄든 어디로 끄든 상관없이 스위치는 꺼진다.
◎ 질의 상호작용 – 양쪽이 시간과 공간을 일치시킨다.
◎ 입자 일방작용 – 시간을 열고 한쪽이 공간을 일치시킨다.
◎ 힘의 상호전달 – 시간과 공간을 열어놓고 일을 전달한다.
◎ 운동 일방전달 – 시간을 죽이고 공간만 전달한다.
◎ 량의 최종집행 – 시간과 공간을 모두 죽인다.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전혀 판단할 필요가 없는 것이 량이다. 운동은 시간을 판단할 필요가 없지만 공간을 판단해야 한다. 힘은 시공간을 다 판단해야 하지만 값을 고정시켜 두었다. 입자는 시간을 고정시켜 두었고 공간을 조절한다. 질은 시간과 공간 양쪽을 동시에 조절한다. 가위나 칼은 조절기능이 없다. 조절은 사람이 하는 거지 도구가 하는게 아닌 것이다.
◎ 질의 상호작용 – 언제 어디서 만나자.
◎ 입자 일방작용 – 아무때나 어디서 기다려라.
◎ 힘의 상호전달 – 정확히 언제 어디를 때린다.
◎ 운동 일방전달 – 아무때나 어디를 때린다.
◎ 량의 최종집행 – 아무때 아무데 때린다.
◎ 질의 상호작용 – 남녀가 7시에 서울역에서 만난다.
◎ 입자 일방작용 – 집배원이 아무때나 우리집을 방문한다.
◎ 힘의 상호전달 – 가위는 아귀가 맞을 때 칼날로 자른다.
◎ 운동 일방전달 – 칼은 아무때라도 칼날로 자른다.
◎ 량의 최종집행 – 스위치는 그냥 누른다.
질과 입자는 조절기능이 있고, 힘과 운동과 량은 조절기능이 없으니 디폴트값이 정해져 있다. 데이트를 할 때는 잘하거나 못하거나 간에 분명히 차이가 있다. 소개팅을 잘해야 애프터 신청을 받는다. 용돈을 줘도 적게 주는 것과 많이 주는 것이 다르다. 그러나 가위를 세게 자르거나 약하게 자르거나 잘리는건 똑같다. 스위치를 세게 누른다고 전구가 밝아지겠는가?
힘과 운동과 량은 일을 전달만 하고 스스로 의사결정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 두 사람이 거래를 하려면 양쪽의 배짱이 맞아야 한다. 이것은 질의 상황이다. 양쪽 다 조절기능이 있다. 파는 사람은 되도록 비싸게 조절하고 사는 사람은 되도록 싸게 조절한다. 그러나 용돈을 주려면 받는 쪽의 의사는 무시하고 주는 쪽의 의사가 일방 결정한다. 닭에게 주면 안 된다.
아무 때나 용돈을 주지만 개나 돼지에게는 주지 않으니 정확하게 제 자식에게 줘야 한다. 그런데 강용석에게 한 방을 안겨줄 때는 그냥 주는 거다. 시도 때도 없이 주는 거다. 그런데 정확하게 강용석을 때려야 한다. 실수로 강욘석을 때리면 안 된다. 때리는 타이밍도 맞아야 한다. 밥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 했으니 그건 가려서 밥을 안 먹을 때 앵겨줘야 한다.
힘은 씨름과 같아서 정확하게 그 타이밍에 그 지점을 타격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정해져 있다. 강용석이 80킬로의 체중이라면 80킬로의 힘을 가해야 들배지기를 할 수 있다. 시간의 타이밍과 공간의 지점이 맞아야 한다. 질과 입자는 디폴트값이 정해져 있지 않고 힘은 정해져 있다는 점이 다르다. 운동은 타이밍은 상관없고 공간의 방향만 잘 맞추면 된다.
량은 시간의 타이밍도 필요없고 공간의 방향도 필요없다. 손에 쥔 사과로 지구를 맞추려면? 그냥 놓으면 된다. 언제 놓아도 지구를 맞출 수 있고 어느 방향으로 놓아도 지구를 맞출 수 있다. 즉 자신이 정할 수 있는게 하나도 없는 것이다. 여기서 질≫입자≫힘≫운동≫량의 순서로 개입범위가 줄어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매개변수의 수가 감소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냥 인과율을 배우지만 다섯 개의 원인과 결과가 있다. 이런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서 안 배워도 대강 한다. 데이트 할 때는 상대방 의사도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정치판을 보자면 유권자 의사는 무시하고 일방 독주하는 정치인이 대부분이다. 기본이 안 되어 있다. 야당무시 국민무시 막가파 정치가 횡행한다.
구조론은 너무나 쉽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감각적으로 아는 것을 조금 더 엄밀하게 들여다 본 것이다. 이런거 몰라도 되겠거니 하지만 정치인들이 판판이 깨지는 것을 보자면 필요한 거다. 이것이 진짜 과학이다. 이런거 몰라도 데이트 하는데 지장없으니 대충 넘어간 거다. 그러다가 인류문명이 위기에 몰렸다. 초등학생도 스마트폰을 쓰는 세상이다.
초등학생에게 인류의 운명이 맡겨질 수도 있다. 이제는 좀 신중하게 엄격하고 들여다보고 따질 것을 따져야 한다. 1 1=2가 되는 것도 상호작용에 의해 되는 것이다. 1 1과 2가 서로 호응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문제가 부르고 답이 응답한다. 그리하여 사건을 이루면 사건 안에서 인과율이 기능한다. 이러한 근본에서 우리는 너무 멀리 벗어나서 잘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