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의 역설을 이해하자**
우주 안에 플러스는 없다. YES는 없다. 세상은 오직 NO에 의해서만 작동한다. 우주가 거대한 전기회로라면 그 회로를 차단할 수 있다. 무에서 유가 생겨날 수 없으므로 회로를 새로 만들 수는 없다. 그러므로 YES는 없다. 이를 이해하려면 의사결정으로 보는 관점을 얻어야 한다. 권한이 누구에게 있느냐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적인 대화에서 말하는 YES는 무엇인가? 그것은 가짜다. 제 힘으로는 결정할 수 없다. 상대방이 줘야 YES 하고 받는다. 주지도 않는데 받는건 이상하다. 권한은 주는 쪽에 있다. 주는 사람은 자신에게 남아돌아서 마이너스를 행한 것이며 자신에게 NO를 한 것이다. 의사결정이 일어났다.
정설은 상대방의 결정을 받아들인 것이며 곧 낚인 것이며 당한 것일지언정 행한 것이 아니다. 무엇인가? YES는 의사결정권이 없는 아기의 언어이며 그 의사결정의 주체는 엄마다. 엄마의 NO가 아기의 YES다. 그러므로 학교에서 YES를 가르치는 것은 학생을 의사결정의 주체로는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전쟁터라고 치자. 적군에게 YES 하면 죽는다. 대장에게는 YES를 해야 한다. 의사결정의 주체는 대장이다. 훈련 때는 YES를 하다가 실전 들어가면 적군에게 NO를 한다. YES를 하는 동안은 계급없는 훈련병이지 정규군이 아니다. 총은 적에게 NO를 하라고 주는 것이며 NO를 할 능력이 생겨야 군인이다.
NO에서 사건은 시작된다. 그것이 역설이다. 역설은 상대방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며 상대방에게 NO라고 말하는 것이다. 씨름이라고 치자. 상대방이 내 힘을 받아라고 명령한다. YES하고 받으면 진다. YES는 패배자의 언어다. 의사결정이 아니고 당한 거다. NO를 구사하여 되치기를 해야 씨름을 이기는 거다.
이러한 역설의 방법은 에너지의 출처가 상대방에게 있으므로 잠정적이고 한시적이며 제대로 된 것이 아니다. 복제가 불가능하다. 같은 수법에 상대가 두 번씩 당하지는 않는다. NO로는 먼저 상대방에게 말을 걸 수 없다. 남녀관계라 치자. 두 사람이 다 NO를 휘두르고 있으면 연애는 조금도 진전되지 않는다.
이중의 역설은 에너지를 생성할 수 있는 구조다. 스스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 먼저 말을 걸 수 있다. 단 세팅하는 절차가 복잡하다. 일단 두 명 외에 방해자인 제 3자가 있어야 한다. 두 사람이 만났다면 둘 다 서로에게 NO의 상태다. 이때 외부세력이 공격해온다. 방해자 외부세력에다 NO를 구사한다.
그것은 NONO다. 남녀 두 사람이 있는데 괴한이 습격하면 두 사람이 힘을 합쳐 괴한을 퇴치하게 된다. 이때 괴한의 에너지를 흡수하여 강력해진다. 의사결정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에너지를 흡수한다는 것은 힘을 합친 두 사람의 상호작용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다시 거리가 멀어진다.
긴밀해진 상태에서 장차 거리가 멀어질 가능성을 얻은 것이 에너지다. 그러므로 에너지가 있다는 것은 나빠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나빠진다. 이 구조 외에는 없다. 사랑한다는 것은 다시 멀어질 가능성을 얻은 것에 불과하다. 왜 NONO인가? 서로에가 향해진 NO에 NO하여 거두기 때문이다.
척력은 항상 작동하고 있어야 하므로 그 거두어진 칼은 누군가에게로 향해진다. 한일이 친하려면 칼은 중국을 겨냥하게 된다. 중일이 친해버리면 한국이 엿되는 것이다. 칼은 제 3자에게로 향해지며 그것은 환경이다. 환경과의 관계를 드러내야 한다. 두 사람이 환경이라는 토대를 공유함을 드러내야 한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토대를 공유하고 있다. 뉴욕이거나 혹은 서울이거나 말이다. 그 공간과의 긴밀한 호흡을 드러내느냐가 중요하다. 두 사람이 사랑한다는 것은 흔들리는 뱃전에 앉아 출렁이는 파도에 몸을 맡기고 리듬을 타는 것이다. 두 사람의 갈등이 바다와의 갈등으로 바뀐다.
모든 존재는 척력을 구사하여 서로를 밀어낸다. 아기는 그렇지 않은데 아기는 엄마에게 잡혀 있으므로 논외가 된다. 그 서로 밀어내는 힘을 극복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나 그 사랑 역시 외부에 있는 공동의 적을 밀어내는 힘이다. 그냥 천사처럼 순수하게 사랑한다는 따위는 판타지다. 그런건 절대로 없다.
공주인 나를 위해서 혹은 왕자인 나를 위해서 순수하게 내게 헌신해줄 천사같은 사람은 없느냐는 이기적인 생각을 하는 새뀌는 쳐죽이는게 맞다. 그러나 드라마에는 공주님의 충직한 보디가드 백치 이정재나 혹은 왕자님에게 헌신하는 산골처녀의 백치미를 강조한다. 남자든 여자든 우직한 백치라야만 한다.
악랄한 이기심이다. 옛날에는 밸런스의 회복에 주목했다. 세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나 한국의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처럼 기울어져 있는 저울의 평형을 바로잡는 것이 러브스토리였다. 남미의 텔레노벨라는 아직도 이 수준에 머물러 있다. 보통은 남자가 여자를 남겨놓고 집을 나간다. 뭔가 기울어진다.
10년 후에 나타난 남자가 그동안 개고생 했어. 여보 미안해 하고 반성을 하는데 기울어진 평형이 회복되어 있다.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등에서 대히트다. 판에 박힌 공식이다. 춘향전은 좀 낫긴 하지만 역시 암행어사 이몽룡 쪽으로 기우는 저울을 춘향의 절개로 균형을 맞춰 저울을 바로 세우는 이야기다.
진정한 사랑은 서로 대등해지려는 마음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헤어지게 됩니다. 헤어질 것을 감수해야 진짜 사랑은 가능합니다. 어차피 날이 밝으면 헤어질 것을 각오해야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하나 건지는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