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말을 배웠지만 단어를 익혔을 뿐 문법을 학습하지 않았다. 더욱 생각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았다. 문법은 배우지 않아도 그냥 안다. 생각하는 방법 역시 배우지 않고 그냥 안다. 그런데 이상하다. 다들 생각하는 방법을 맞게 쓰고 있는가? 다들 어떤 도구를 쓰는 거지?

그런데 왜 나와 생각하는게 다르지? 위爲하여는 뭔가 위태롭고 의依하여는 뭔가 의지가 된다. 그것은 느낌이다. 상하좌우, 고저장단처럼 ‘의위依爲’는 짝지어져 대칭된다. of, by, for는 그냥 안다. of가 깔고 앉은 의자라면 by는 코앞의 모니터이고 for는 출입문쯤 된다. 거리가 다르다.

그래서 ‘국민의’가 앞이다. 감각적으로 알아야 한다. 그 감각도 복제된다. 최초의 근거를 찾는게 중요하다. 최초의 근거를 생각해본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다. 탈레스도 있다. 탈레스는 성급하게 완성된 모형을 제시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조금 더 파고들어가서 논리적 근거를 찾았다.

탈레스는 그냥 직관적으로 찍은 거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접근이 구조론적이다. 그 성과가 3일치법이다. 여기에 근대성의 싹이 있다. 서유기나 수호지는 에피소드가 옴니버스로 이어져서 이야기가 끝도 없이 늘어진다. 복카치오의 데카메론이나 아라비안 나이트도 그렇다. 뭔가 허술하다.

집을 짓되 대문도 없고 마당도 없이 방만 계속 만들어내는 식이다. 제자리서 뱅뱅 돌게 된다. 발전이 없다.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건의 완결성이라는 어떤 본질을 찾아냈다. 그러나 더 발전시키지 못했다. 중요한 힌트를 던져주었을 뿐 꽃을 피우지 못했다.

4원소설은 턱도 없는 이야기다. 자체 완결성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3일치법에서 하나의 사건을 주장했지만 4원소설은 이미 물, 불, 흙, 공기로 4개의 사건이다. 8개나 16개는 안 된다는 근거가 없다. 구조론이 밝히는 우주의 절대근거는 오직 하나이니 그것은 에너지의 방향성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 물, 불, 흙, 공기의 고유한 속성이 우주의 근거다.

◎ 데카르트 = 운동과 그 운동을 내포한 관성이 근거다.

◎ 뉴턴 = 운동을 연출하는 절대시공이 근거다.

◎ 아인슈타인 = 관측자와의 관계가 근거다.

◎ 구조론 = 에너지의 방향성이 근거다.

존재가 사유의 근거다. 그것이 존재하므로 비로소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존재가 뭐지? 존재는 인간이 지목하여 가리키는 것이다. 관측자의 관점이다. 관측자가 개입하면 오류다. 존재의 이면에 사건이 있다. 사건이 근거다. 사건을 일으키는 것은 에너지다. 에너지가 최종근거다.

에너지는 방향성이 있다. 에너지의 방향성이 근거다. 더 이상은 없다. 왜? 근거를 찾는다는 것은 통제가능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통제된 것은 질서, 통제되지 않는 것은 무질서다. 무질서이나 질서로 변환될 수 있는 것이 에너지다. 에너지의 방향성을 통제하여 무질서를 질서로 전환한다.

어떤 둘이 엮여 있으면 모순이므로 방향성이 생긴다. 곧 사건이 격발된다. 관성계가 만들어지면 곧 존재다. 거기서 관측자와의 관계가 생긴다. 시공간은 관측자와의 관계를 객관화 한다. 탈레스는 물을 말했다. 사실은 에너지를 말하려고 했던 것이다. 에너지의 성질을 물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이지 탈레스는 물의 성질로 비유하여 표현될 수 있는 어떤 미지의 것을 말하려고 했던 것이다. 물이 한 방향으로 흐르듯이 에너지는 일정한 조건에서 방향을 만들어낸다. 물의 수압이 일정하게 걸리듯이 계를 만들어낸다. 공간은 크기가 있고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방향이 있다.

최종근거는 시공간보다 더 먼저여야 한다. 방향이 정해지면 안 되고 방향을 만들어내는 그것이어야 한다. TPO(시간Time, 장소Place, 상황Occasion)라는 것이 있다. 면접을 보든 데이트를 하든 이 세 가지를 고려하여 거기에 맞는 옷을 입고 나가야 한다. 일본에서 많이 쓰는 말인 듯 하다.

“TPO란 원래 경찰이 사용하는 보고서 작성요령으로, 사건기록의 중요한 3요소인 Time(시간), Place(장소), Occasion(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꽤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단어다.[검색]”

시간과 장소는 원래 있고 거기에 존재가 아파트분양권을 얻어서 입주해 있는게 아니라 사건이 발생하려면 에너지가 작동해야 하고 에너지 작동의 결과로 공간과 시간이 연출되는 것이다. 그것이 존재다. 존재가 그냥 우두커니 있는 것은 인간의 관측이고 사실은 각운동량을 보존하고 있다.

내부에서 활발하게 상호작용하고 있다. 구조론 이해의 첫걸음은 객관화 하는 것이다. 관측자를 배제해야 한다. 달고 쓰고 맵고 짜고 이런건 관측자가 개입한 바 가짜다. 존재라는 것도 역시 관측자에 대해 존재하는 것이다. 관측자와 관측대상 둘이 계를 형성한다는건 아인슈타인의 갈파다.

‘나를 비워라. 나를 내려놓아라.’ 이런건 스님들이 노상 하는 말이지만 실천하기가 어렵다. 나를 배제하면 주어가 실종되어 말을 하기가 어렵다. 그때는 미지수 X를 도입하면 되는데 그게 훈련되어 있지 않다. 계系 혹은 장場이라고 해도 되는데 한국말은 두 글자가 보통이라 익숙하지 않다.

인간의 맞은 편에 존재가 있다. 존재는 갖추어져 있다. 갖추어져 있는 것은 그대로 있다. 우리가 노려야 하는 것은 변화다. 농성하는 적군을 요격하려면 성 밖으로 유인하여 끌어내야 한다. 존재 속에 숨은 물질의 내적 질서를 끌어내는 방법은 사건에 올려태우는 것이다. 관측자의 개입이다.

관측자를 배제하고 온전히 존재 내부에서 어떤 질서가 작동하고 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질서가 아니면 무질서다. 무질서는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무질서에서 질서로 바뀌는 순간을 노려야 한다. 척력에서 인력으로 전환되는 지점이 길목이다. 거기에 포착해야 할 에너지의 방향성이 있다.

양자역학 역시 에너지의 방향성으로 설명한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구조론이 그러니깐. 필자가 양자역학을 연구해서 알아낸게 아니다. 방향을 만들려면 최소 두 개의 지점을 설정해야 한다. 점을 한 개 찍으면 방향이 없다. 위도 없고 아래도 없고 왼쪽도 없고 오른쪽도 없다. 그래서 둘이다.

움직이는 두 개의 방향 →←이 엮여 互자 모양을 이룬 것이 구조론의 모형이다. 우리는 운동을 →로 이해하지만 이런 운동은 없다는게 필자가 17살 때 알아채서 스스로 깨달음을 선언한 근거다. 우주 안에 A에서 B로 가는건 없다. 모든 운동은 →←며 互에 가깝다. 위치가 없다는 말이다.

위치가 생기면 크기가 생기고 크기가 생기면 무한대가 생겨서 골치아파진다. 무한대는 플러스인데 구조론은 마이너스이므로 일단 배제한다. 즉 통제가능성이다. 광속이 무한하다면 질량도 무한대가 되어서 곤란해진다. 발산하는 것이다. 통제가 안 된다는 말이다. 통제된다는 전제를 깐다.

왜? 어쨌든 우리가 눈으로 보는 우주는 존재하고 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거기에 얌전히 있다는 말이다. 즉 통제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에너지는 통제될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해야 한다. 즉 ←→이면 안 되는 거다. 우주는 ←→일까 아니면 →←일까? 둘 중에서 결론을 내려야 했다. →←다.

우리는 입자에 기대를 건다. 어떤 위치가 있다는 거다. 존재는 특정한 시공간적 위치에 있다. 그러면 곤란해진다. 무한대의 압박을 피할 수 없다. 전자는 공간적 위치를 찾을 수 없다. 그게 있으면 안 된다. 우주는 입자의 집합이 아니다. 애초에 집합이 아니다. 구조론은 복제가 집합을 대신한다.

우주는 →←이며 정확히는 무질서 ←→에서 사건이 격발되면 질서 →←로 바뀐다. ←→는 통제되지 않는 상태이며 무질서 ←→에서 질서 →←로 바꿀 수 있는 상태가 에너지다. 가솔린을 태우면 가스들은 실린더 안에서 ←→로 존재한다. 피스톤을 밀어내면서 →←로 바뀌어야 운동에너지다.

자연계를 구성하는 16가지 소립자들은 모두 →←로 봐야하며 관측하는 순간에 ←→에서 →←로 바뀐다. 어쨌든 초끈이론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양자역학의 성과들이 구조론의 기본설정과 유사하다는 점을 여러분은 쉽게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뭐 어려울게 없다. 구조론은 원체 간단하니까.

데카르트와 뉴턴은 운동으로 죄다 설명하려고 했다. 그런데 운동으로 설명하려니 절대시공이 필요해졌다. 그걸 있다고 치고 계산해보니 맞다. 절대시공이 있다고 선언되었다. 근데 빛의 성질이 입자와 파동 두 가지를 겸하니 곤란해졌다. 아인슈타인이 관측자의 개입을 들이대서 이를 파훼했다.

구조론은 원래부터 관측자를 배제하고 시작한다. 그건 당연히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위하여니깐. 빨간 것을 보고 빨갛다고 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건 파란 것과 비교된 거니깐. 비교해서 말하면 안 된다. 상대어는 곤란하고 절대어로 말해야 한다. 빨간색을 연출하는 내적 질서는?

가시광선의 파장이 있다. 뭐든 내부에 자체질서가 있다. 물리학자들이 전자를 입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내부질서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자를 붙잡아서 망치로 깨뜨리면 뭔가 부스러기라도 나온다는 식이다. 우주에는 오직 에너지의 방향성이 있을 뿐이다. 확신방향이냐 수렴방향이냐다.

이런거 꼬맹이때 당연히 생각해봤어야 합니다. 구조론이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런 것을 소싯적에 생각해보지 않은 거지요. ‘선과 악이라는 것은 도대체 뭘 근거로 그따위 수작을 하는 거지?’ 집단의 방향성이 근거가 됩니다. 근데 집단의 방향성이 있는거 맞어? 내가 집단의 일원인게 맞어? 만약 집단의 방향성이 있는게 맞다면 진보해야 한다는 이야긴데 과연 세상이 진보하는게 맞어? 이런 생각을 해봤냐는 거지요. 그런거 없이 그냥 착한게 선이고 나쁜게 악이라는 식이면 곤란하지요. 착한건 뭐고 나쁜건 뭔데? 결국 자기 감정을 근거로 자기소개 하는 거죠. 감옥에 있는 폭력배들은 대부분 ‘맞을 짓을 했다’고 상대방 탓을 합니다. 왜? 나를 화나게 했으니깐. 진짜로 화가 났다니깐. 화라는 감정이 났다는게 근거죠. 그런건 인정되지 않습니다. 누가 화내랬냐고. 화를 내면 안 되죠. 집단이 존재하고 그 집단은 진보하는 집단이며 내가 그 집단의 일원이고 집단과 긴밀하게 상호작용할 때 관성의 법칙에 의해 자연스럽게 그 집단의 방향성을 따라가는 것이 선이고 역주행은 악입니다. 굉장히 까다로운 조건이 걸려있다는 거죠. 그냥 선이다 악이다 하는건 말도 안 되는 수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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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kim

2017-04-05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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