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알려면 구조를 알아야 한다.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은 그것의 구조를 안다는 말이다. 자본을 알려면 자본의 구조를 알아야 하고, 생명을 알려면 생명의 구조를 알아야 한다. 정치를 알려면 정치의 구조를 알아야 하고, 마음을 알려면 마음의 구조를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구조는 지식과 동의어나 마찬가지다. 반대로 구조론의 의미는 인류에게 제대로 된 지식이 없다는 사실의 폭로에 있다.

구조는 얽힘이다. 공간으로도 얽히고 시간적으로도 얽힌다. 공간의 얽힘이 구構, 시간의 얽힘은 조造이니 합쳐서 구조構造가 된다. 구조는 공간과 시간으로 얽혀 사건을 만든다. 그러므로 구조는 사건의 구조다. 무엇인가? 우리는 그동안 공간에 놓인 사물의 구조에 주목했을 뿐, 시간에 놓인 사건의 구조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의사결정단위들의 연결로 이루어진 사건의 구조를 알아채기다.

사건이 자연으로 가면 물질이 되고 인간으로 오면 사회가 된다. 우리는 물질의 에너지 구조를 알아야 하고, 또 사회의 의사결정구조를 알아야 한다. 그 이전에 크게 깨달아야 한다. 세상이 근본 물질의 집합이 아니라 에너지 복제로 이루어졌음을 깨우쳐야 한다. 물질이냐 에너지냐의 차이는 인간이 세상을 대하는 자세의 차이로 발전한다. 물질이라면 대상 내부의 고유한 속성에 답이 있다.

밤의 답은 밤송이를 까봐야 알고 호두의 답은 호두알을 까봐야 안다. 부럼을 깨물어야 쭉정이와 알밤을 가릴 수 있다. 수박이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는 칼로 잘라봐야 안다. 답은 언제라도 내부에 있다. 그러나 에너지는 다르다. 에너지는 무조건 밖에서 온다. 전기의 스위치는 바깥에 있다. 전구 속에 스위치가 들어있는 경우는 없다. 전기가 바깥에서 들어오기 때문이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외부로 나가 먹이활동을 해야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 식물이 의지하는 햇볕과 물도 바깥에 있다. 자본이 의지하는 시장과 혁신도 바깥에 있다. 정치가 의지하는 민심도 의사당 바깥에 있다. 그러나 보라. 오늘날 좌파든 우파든 모두 고립주의와 배타주의 외길로 치닫고 있다. 안에서 답을 찾으려고 애를 쓴다. 진보는 반일, 반미에 분주하고 보수는 반북, 반중에 분주하니 모두 바깥을 겁낸다.

구조의 답은 언제라도 바깥에 있다. 안도 물론 중요하다. 밖에서 에너지를 끌어댄 다음에는 내부에서 처리해야 한다. 상황을 장악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보라. 좌파들은 노상 서구를 숭배하기에 바쁘니 외부에 줄을 대는데 분주할 뿐 내부에서 그 에너지를 처리하지는 못한다. 노무현과 문재인의 득세는 한국 내부에서 그 에너지를 처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중요한건 수순이다. 선외부 후내부다. 장기전은 외부를 보고 단기전은 내부를 본다. 좌파들이 이 길이냐 저 길이냐 노선타령에만 분주한 것은 세상을 밤이나 호두와 같이 껍데기를 까고 알맹이를 꺼내먹는다는 원자론적 발상에 잡혀 있기 때문이다. 밤이나 호두를 고를 때는 선택을 잘해야 한다. 잘못하면 쭉정이가 나온다. 정치라면 노선이 중요한 것이다. 주식이라도 종목선택을 잘해야 한다.

그러나 에너지로 보면 다르다. 종목은 중요하지 않고 운용이 중요하다. 좋은 차를 수렁으로 몰면 망하고 나쁜 종목이라도 물타기를 열심히 하면 돈을 벌 수 있다. 고수는 주가가 오르면 올라서 벌고 떨어지면 공매도로 번다. 양쪽으로 돈을 번다. 변동성만 있으면 무조건 번다. 바람이 순풍이면 배가 잘 가고 역풍이라도 지그재그 항해로 전진할 수 있다. 배는 뒷바람보다 옆바람일 때 빠르다.

구조론으로 보면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다섯 가지 매개변수에 따라 대응방법이 달라야 한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두 번째 입자 관점이다. 세상을 호두나 밤으로 알고 쭉정이가 걸리지 않게 선택을 잘해야 한다는 거다. 고등학생은 대학교를 잘 선택해야 한다. 졸업하면 직장을 잘 선택해야 한다. 그다음에는 배우자를 잘 선택해야 한다. 인생은 늘 선택의 연속이다. 그러나 틀렸다.

왜 자신이 선택하려고만 하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선택하게 하지 않을까? 선택하면 하수다. 상대로 하여금 선택하도록 압박하는 자가 고수다. 북한과 중국과 미국과 일본의 압박에 치이며 우리의 선택을 고민할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주도권을 잡고 북한과 일본과 중국과 미국으로 하여금 선택하도록 압박해야 한다. 선택을 고민한다면 큰 틀에서는 이미 패배해 있다. 선택을 강요하라.

선택하려 한다면 이미 지고 들어가는 게임이다. 세상은 바깥에서 답을 찾는 에너지도 있고 안에서 답을 찾는 물질도 있지만, 수순으로 보면 에너지가 먼저고 바깥이 먼저고 내부는 그다음이다. 바깥의 활동공간을 먼저 확보해놓고 내부를 정돈한다. 바깥의 생명줄을 먼저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삿짐을 나르더라도 외부와 연결되는 통로를 먼저 개척하고 내부의 짐을 운반한다. 일머리다.

섬나라 일본처럼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다면 안에서 답을 찾을 수밖에 없지만 지고 들어가는 게임이다. 중러미일 주변 사강을 서로 교착시켜 놓고 중간에서 교통정리를 잘 하는 방법으로 우리는 답을 낼 수 있다. 이는 강자의 방법이다.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입장과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무조건 안을 헤집고 보는 패배주의에 길들여져 있다. 왜? 약하기 때문이다.

5천 년 동안 우리는 강했던 적이 없다. 밖에서 얻어맞고 집안에서 화풀이하는 폭력가장처럼 행동해왔다. 아니래도 인류의 대부분은 사실 약자다. 월드컵에 32강이 올라가도 어차피 우승팀은 독일팀 하나다. 나머지 31개팀은 독일을 위해 들러리를 서는 약팀이다. 그래서 우리는 약자의 사고에 익숙한 것이다. 강자의 사고를 익히지 않으면 강해질 수가 없다. 강자는 결코 남탓을 하지 않는다.

강하면 단기전으로 이기고 약하면 지구전으로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이길 수 있다. 무조건 이긴다. 단, 장기전을 선택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의 행동이 개인 내면의 사정이라 할 선이나 악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의사결정구조에 지배됨을 깨우쳐야 한다. 선악은 사건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원인은 사회관계의 긴밀함이다. 사회관계가 느슨하면 그것이 곧 악이다.

자연의 물질은 원인이 아니라 에너지 복제과정에서 도출된 결과이며 인간의 선이나 악은 사건의 원인이 아니라 사회적인 의사결정구조의 작동에 의해 도출된 결과다. 만유는 반드시 자궁이 있으며 그 자궁은 단단한 알갱이나 고유한 속성으로 된 것이 아니라 활동적이고 부드러운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뭐든 딱딱한 것은 임시미봉책일 뿐 궁극적인 해답이 아니다.

구조라 하면 딱딱한 것을 떠올리기 쉽다. 건축구조나 동물의 뼈대나 이런 걸로 구조를 배웠기 때문이다. 진짜는 의사결정구조다. 정치라면 민심의 구조다. 물질도 깊이 들어가면 양자화되어 부드러운 구조로 변한다. 구조는 어떤 둘이 하나의 토대를 공유하는 형태로 모순을 일으켜서 얽힌 것이다. 부부 둘이 하나의 건물을 공유하고 사는 것과 같다. 구조는 일정한 조건에서 딱딱하게 변한다.

딱딱하다는 것은 외력에 대항하여 위치를 지킨다는 거다. 그것은 구조의 한 가지 형태일 뿐 구조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전개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가진다. 빨아들이는 구조와 맞서는 구조와 비트는 구조와 움직이는 구조와 깨지는 구조가 있다. 우리는 그중에서 맞서는 구조 하나만 알고 있다. 맞설 때 딱딱한 거다. 미혼남녀의 밀당처럼 부드러운 것이 진짜다. 딱딱한 사람은 기혼자다.

우리는 건물처럼 제 위치를 지키는 딱딱한 구조를 알 뿐 생명의 복제구조처럼 부드러운 구조를 알지 못한다. 노자는 이유극강이라 했다. 사실은 부드러운게 먼저고 딱딱한 것이 따른다. 만날 때 부드럽고 만나서 얽히면 딱딱해진다. 딱딱해진다는 것은 이미 포지션을 잃고 에너지를 잃고 활동성이 죽었다는 의미다. 미혼자가 기혼자로 바뀌어 외부와의 관계맺기에서 선택지를 상실한 것이다.

엔트로피가 증대하여 상태변화가 어려워졌다. 문재인의 미소처럼 부드러운 것이 살갑고 좋은 것이며 목에 기브스한 박근혜처럼 뻣뻣한 것은 냉담하니 좋지 않다. 칼날은 딱딱해야 좋지만 부드러운 손길이 그 칼을 지배해야 한다. 에너지는 언제라도 부드러움을 따라간다. 딱딱한 연탄보다 부드러운 석유를 쓰는게 그러하다. 딱딱한 다이아몬드를 쓰더라도 부드러운 손가락에 끼어야 반지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구조를 모른다는 점이다. 딱딱한 사물의 구조를 알되 부드러운 사건의 구조를 모른다. 딱딱한 것은 내부에 집합되고 부드러운 것은 외부로 연결된다. 우리는 안에 잡아가두고 통제하는 방법을 알 뿐 밖으로 풀어놓고 통제하는 방법은 전혀 모른다. 인간은 대개 선악으로 통제하려고 한다. 평판공격이다. 이는 내부에 잡아가둬놓고 딱딱한 것으로 통제하는 방법이다.

밖으로 길을 열고 에너지 낙차를 조직해 놓으면 가만 놔둬도 저절로 한곳에 모이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약한 것을 찾아 만만한 것을 지배하려고 한다. 에너지의 진행경로가 되는 결이다. 물이 바다로 가듯이 사건의 결을 만들어놓으면 저절로 한곳에 모인다. 억지로 잡아가둘 이유도 없고 고함질러 꾸짖을 이유도 없다. 붙잡지 않아도 붙잡혀 있고 부르지 않아도 찾아와 있다. 답은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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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kim

2018-01-02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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